‘전국지 지향’ 주류신문 도약나서

동포언론현황취재-중국(하) 길림신문

연변 길림=김용필기자  |  ypkim337@yahoo.co.kr

승인 2006.01.31  00:00:00

 

▲ ‘여론 감독을 잘 해서 그 힘이 무궁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새긴 휘장 앞에서 한정일 부주필과 전춘봉 부장이 섰다. 이 휘장은 지난해 10월 길림성부분조선족로무대표가 길림신문사에 감사의 뜻으로 보내온 것이다. 길림신문사 사무실에서 촬영. [사진=김제완기자]
 
최근 인터넷판을 개설하면서 길림신문은 ‘중국전지역의 뉴스를 한글로 보여주는 성급 우리말 신문’을 표방했다.

이어 지난 1월 17일, 흑룡강신문사에서 동북3성의 대표적인 동포신문사인 흑룡강신문, 요녕조선문보와 함께 기사공유를 합의해 동북3성 동포언론이 서로 힘을 합쳐 민족언론을 키우고 민족문화 고수와 언론시장 공유를 통해 공동 번영을 꾀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길림신문은 1985년 4월 1일 창간된 조선족언론 중에서 젊은 신문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총 직원 40명 중 취재기자는 20명으로 격일간 주 3회 발행하고 있다.

화·목요일판은 4면, 주말판은 8면으로 매회 5만부를 발행하고 있다. 주목할 사실은 젊은 신문답게 99년도부터 한국인의 중국생활을 돕기 위해서 동북저널을 발행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길림성은 연변자치주를 제외한 산재지구에 40만 조선족인구가 거주하며, 길림성 성도인 장춘은 8만 조선족인구가 거주하며 성급 조선족지도자와 한국인 투자자들이 모여 사는 역동적인 곳이며, 농촌에서 도시로 진출한 조선족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길림신문은 조선족사회의 내부적인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면서 또 새로운 역동성 보여주는 신문이라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족사회 내부에서도 길림신문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길림신문은 열악한 재정과 내부문제로 어려움을 겪다가 2005년 4월 남영전 사장 체제가 성립되면서 주변의 경제 기업인들로 구성된 지인들을 한데 모아 힘을 모으고 민족신문이 살아움직여야 한다는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재도약의 기반을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민족신문으로 거듭난다는 각오로 길림신문은 특별기획 ‘새 세기 조선족사회 새 현상’을 연재보도해 변화하는 조선족사회의 문제점을 과감하게 파헤쳐 호평을 받았다.

특히 법무부가 지난해 3.15 ‘동포귀국지원프로그램 실시’ 정책을 펼칠 당시 중국으로 자진귀국한 불법체류동포를 상대로 중국공안이 공항에서 벌금을 부당하게 부과한 사실을 보도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미 벌금을 부과해 영수증을 갖고 있는 동포에겐 벌금으로 낸 돈을 되돌려 받게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안중근의사 의거현장 하얼빈역

동포언론현황취재 2015. 11. 29. 11:18 Posted by 세계로김

안중근의사 의거현장 하얼빈역

김제완기자  |  oniva@freechal.com 

승인 2005.12.16  00:00:00
     

 
1909년 10월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역의 모습. 역사에는 디지털TV 광고 플래카드가 붙어있을뿐 아쉽게도 안의사의 숨결을 느낄수 있는 표지는 찾을수 없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인터넷이 강한 격일신문 ‘밴조선’

동포언론현황취재 - 밴쿠버편

김제완기자  |  oniva@freechal.com

승인 2005.12.01  00:00:00

미주지역 동포언론계는 한국일보와 중앙일보가 터줏대감처럼 자리잡고 있어 조선 동아등 후발주자들에게 높은 진입장벽을 쌓아놓고 있다. 몇해전 조선일보가 뉴욕에서 동아일보는 LA에서 진입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단지 조선일보는 브라질 상파울로와 캐나다 밴쿠버를 차지했을 뿐이다. 

‘밴조선’으로 알려진 밴쿠버조선일보 www.vanchosun.com는 그러나 조선일보의 명성보다 경영자 개인의 힘으로 현재의 위치까지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동기사장이 96년 창간한 뒤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있다.

밴쿠버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모두 8개이다. 일간지 2개, 격일간 2개, 주간지 4개로 나뉘어진다. 밴조선은 창간 이후 주간으로 발행돼오다가 2002년부터 사세가 확장돼 주2회 발행을 시작했다. 그뒤 2003년부터 격일간으로 발행주기를 좁혀나갔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조선일보 지국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좋은신문 밝은 사회”라는 모토아래 편집국 기자 5명등 13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교육도시이므로 교육관련 기사 많고 부동산 붐에 따라 부동산기사도 늘어났다. 이외에 이민정보기사가 늘 빠지지 않는다. 주말에는 스포츠조선 섹션을 발행하기도 한다.

밴조선의 힘은 인터넷에서 잘 나타난다. 일찌기 98년에 김동기사장이 인터넷 사이트에 관심 갖고 투자했다. 현재 밴쿠버에서 가장 활발한 사이트로 자리잡고 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서울서 가장가까운 도시 밴쿠버

동포언론현황취재 2015. 11. 29. 11:10 Posted by 세계로김

서울서 가장가까운 도시 밴쿠버

동포언론현황취재 - 북미주 밴쿠버편

김제완기자  |  oniva@freechal.com

승인 2005.12.01  00:00:00

밴쿠버는 돈많은 은퇴자들이 선호하는 도시다. 이도시를 방문해보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기가 맑고 바다와 산이 수려하다. 사회보장도 잘 돼있고 시민들은 친절하며 범죄발생률도 매우 낮다.

반면 젊은 사람들의 일자리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미국 LA가 도시분위기가 삭막하고 인심도 좋지 않지만 일자리가 많은 것과 대조를 이룬다. 

밴쿠버는 북미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이다. 서울-LA가 항공기 소요시간이 11시간이지만 서울-밴쿠버 구간은 이보다 한시간 이상 덜 소요된다. 이같이 서울에서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사실이 이 도시에 대한 심리적 거리도 좁혀놓았다.

이때문에 최근 들어서 많은 한국인 이민자들과 조기유학생들이 몰려들고 있다. 유동인구까지 더하면 한국인 가주자  숫자를 5만명을 헤아린다.  

지난 80년대와 90년대 투자이민이 집중적으로 들아왔다. 주로 30~40만불이상 재력있는 사람들이 동포사회의 주력을 구성하고 있다. 이때문에 돈있는 사람과 돈없는 사람들로 뚜렷이 대비된다고 한다.

한국유학생만 1만명에 이르는데 이중에 초중등과정 재학생만 70%에 달한다. 이들 어린학생들의 보호자인 기러기엄마와 함께 이들을 보기위해서 서울에서 수시로 날아오는 ‘독수리아빠’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다.

이민에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는 1년이상 워킹비자로 일하면서 가산점을 얻어서 독립이민으로 전환하는 소위 ‘현지이민’이 늘고 있다. 지난 해에만 1300명이 이방법으로 이민했다. 이제 이민도 살아보고 결정하는 시대인 셈이다.

밴쿠버 동포사회의 골치거리는 늘어나는 한국인 밀입국자들이다. 한국의 집창촌 단속에 따라 LA룸살롱을 목적지로 하는 20대여성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주로 미국서부로 가기 위해 밴쿠버 루트를 이용한다. 이때문에 무비자협정 조치가 취소될 수도 있다며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내에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상점들이 종종 눈에 띈다. 우연히 들른 밴쿠버대학의 구내 매점도 밴클리공원 부근의 자전거대여점도 한국인이 주인이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타협없는 직필’ 가시밭길 25년

동포언론현황취재 2015. 11. 29. 11:09 Posted by 세계로김

‘타협없는 직필’ 가시밭길 25년

토론토 코리아뉴스 김원동발행인 명예훼손소송 테러위협등에 시달려

김제완기자  |  oniva@freechal.com

승인 2005.12.01  00:00:00 

캐나다 토론토의 주간신문 코리아뉴스 www.koreanews.ca 발행인 김원동씨는 언론활동과 관련해 여러가지 일화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직선적이며 타협을 모르는 그의 성격은 곧바로 신문지면에 투영돼 비판의 성역이 없는 신문이 됐다.

그는 지난 25년동안 토론토에서 동포신문을 발행하면서 동포신문이 가장 다루기 어려운 교회 내부의 비리문제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메스를 들이댔다. 이때문에 거의 매년 명예훼손 소송에 시달려야했다. 그는 변호사 비용 대느라 빚을 져야했다고 말한다.

▲ 코리아뉴스 사무실에 서있는 김원동 사장. 사진 오른편의 창밖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자연친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걸려있는 서울 시계는 노무현대통령이 집권한 날 그 시간에 멈춰있어 방문객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명예없는 사람이 명예훼손?

 몇해전 어느 목사와의 법정소송중에  김사장은 다음과 같이 일갈해  토론토 동포 사회에서 유명해졌다. “명예가 없는 사람이 무슨 명예훼손인가...” 그의 독설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지난 80년대 전두환 철권통치시기에 그는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의혈단 단원이 씀직한 글이 담겨있었다. 이때문에 그는 3당합당이 이뤄진 89년까지 17년동안 한국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는 이와 관련 “해외동포사회에도 과거사 청산을”이라는 칼럼에서 놀라운 고백을 한다. “군부독재를 비판하며 동시에 민주화를 부르짖는 글과 몸으로 격렬히 저항했던 필자로서는 한국공관의 보복이 늘 피부에 와 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취침중인 우리부부의 방에 잠입한 정체불명의 괴한들은 수면제를 뿌린 상태에서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전두환에 목숨 끊으라 편지

심야에 테러범이 들이닥쳐 김사장 몸의 예민한 부분에 상처를 내고 갔다는 엽기적인 내용이다.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의아하지만 그의 활동을 당시 전두환정권의 대사관에서 묵시하지는 않았을 것은 틀림없다.

김발행인이 최근 쓴 칼럼으로 “평통무용론”이 많은 반향을 얻었다. 그는 “제3국의 헌법기관이 이 땅에서 활동하는 건 주재국에 대한 모독이자 주권침해로서 불법행위”라면서 비록 평통위원이 명예직이라도 이 문제를 피할수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 4월 기자는 재외동포 언론현황 취재차 코리아뉴스 신문사를 방문했다. 토론토의 명물인 코리아센터 2층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코리아뉴스는 창밖에 나무가 우거져 있어 마치 숲속에 들어있는 듯했다. 이처럼 아늑해보이는 사무실에서 그는 타협을 모르는 ‘직필’의 글을 써온 것이다.

노무현 당선시간에 시계 멈춰

코리아뉴스 사무실에 걸린 시계가 멈춰있는 것도 방문객들을 놀라게 한다. 그는 노무현대통령이 당선된 날 그 시간에 서울시계를 멈춰세웠다고 말한다. 그에게 노대통령 재임 시기는 정지된 시간이다. 80년대 독재정권과 맞서왔던 그가 진보 성향의 대통령에 그처럼 비판적이라니 의아하다.

그는 김영삼 전대통령 진영의 사람들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실제로 70-80년대 YS와 보조를 같이해왔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념이 YS보다 왼쪽으로 더 나간 노무현대통령에는 동의할수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신문사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은 광고 디자인 담당자 한명뿐이다. 그의 표현대로 “글자를 크게하고 적게하는” 신문편집은 부인이 맡고 그가 거의 모든 기사를 작성한다. 타자에 서툴러 독수리타법으로 수많은 기사를 작성해왔다. 이같은 열악한 상황에서 매주 꼬박꼬박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25년간 신문 직접 배달해

김발행인이 지난달 동포신문 발행 4반세기 기념행사를 가졌다. 코리아뉴스 박동호이사장이 쓴 ‘모시는 글’중에 무사고 신문배달 25년을 축하해달라는 말이 가슴을 친다. 마치 격문처럼 강렬한 기를 담아 쓴 초대의 글 한 문단을 인용한다.

“시대를 밝히는 등불 같은 신문, 그러나 군사정권 이래 수많은 핍박과 협박에 시달려야 했던 신문. 사회의 곪아가는 환부를 도려내는 날카롭고 냉철한 메스 같은 신문. 그러나 그로 인해 제대로 된 수혈을 받을 수 없었던 신문. 어두움을 파헤쳐 빛을 쪼이고자 발버둥 쳐 온 신문. 그러나 어둠의 세력들에 포위돼 홀로 이 악물고 싸워야 했던 신문. 그리고 억울하고 멍든 가슴들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부여잡던 신문. 코리아뉴스!”

김발행인은 올해 67세의 노구에도 토론토 시내의 식당과 교회등 배달처에 직접 운전을 하며 배달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금주금연을 지켜와 건강이 받쳐주고 있다. 지난해에는 부인과 함께 미국 캐나다를 한달동안 자동차로 일주했다.

그는 지난해 만 65세가 되면서 연금수혜 대상자가 됐다. 사실상 정년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동포사회의 불합리한 관행과 맞서 싸우는 그의 펜이 언제 정년을 맞이할지는 그 자신도 알수 없다고 말한다.

<토론토의 동포신문 방송 현황>

신문

◇캐나다 한국일보 △창간 1974년 △www. koreatimes.net         △발행인 김명규
◇캐나다 중앙일보 △창간 1992년 △www.joongangcanada.com  △발행인 김효
◇코리아뉴스(Korea News) △창간 1984년 △ www.koreanews.ca △발행인 김원동
 ◇연예신문/토론토 벼룩시장 △창간 1998년                                △발행인 장윤진
◇교차로 △창간 1999년 △ www.canadakcr.com                           △발행인 황영미
◇캐나다 경제 △창간  2001년                                                        △발행인 홍성호
 ◇캐나다 한국인 △창간  2004년                                                    △회장 김완수
 ◇부동산 캐나다 △창간 2003년 ◇Next Korea △창간 : 2000년 △발행인 서정민

라디오방송

◇선교방송 ‘CBS토론토’△개국 1999년                                          △대표 김경희
◇라디오 서울 △개국  2002년                                                         △대표 김정학

TV방송

◇얼TV △개국 2001년                                                                      △대표 : 이장성
◇아리랑 코리아 TV △개국 2002년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인사회 정치력 신장에 일조”

[북미주-뉴욕편] 인터뷰 뉴욕 미주세계일보 채수경 주필

김제완기자  |  oniva@freechal.com 

승인 2005.11.01  00:00:00

지난 4월 재외동포언론 현황 취재차 뉴욕에 소재한 미주세계일보를 방문해 채수경주필(50)을 만났다. 채주필은 80년대부터 미주세계일보와 미주한국일보등 뉴욕동포신문사를 거쳐온 대표적인 동포언론인중의 한명이다. 그에게 뉴욕 한인사회와 동포언론에 대해서 물었다.

-뉴욕동포사회의 경제구조에 대해서.
“뉴욕 이민사회 주력산업은 직종별로 보면 세탁소 네일살롱 과일 생선가게등이다. 이 상점의 고객은 뉴욕시민들이다. 맨하탄의 미국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은 월급받아서 한국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주류경제권에서 번돈이 한인경제권을 살찌우는 구조이다. 동포언론은 이러한 한인경제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주류사회와 한인동포사회등 두개의 문화권에 걸터있는 셈인데.
“한국 이민자들은 대부분 미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마지널 소사이어티(접경사회)에서 생활한다. 예를 들어 급여는 미국식으로 채용은 한국식으로 이뤄진다. 어제 이와 관련된 기사를 내보냈다. 한국인 델리가게 (간이음식점)주인이 나이 60 먹은 사람을 고용해서 12년동안 일했다. 그런데 이사람이 오버타임수당을 못받았다고 고소해서 7만3천달러를 받아냈다. 델리가게 주인은 처지가 딱하다고 보고 동포라는 이유로 채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식 노동자 권리라는 잣대를 이민사회에 들이댄 것이다.”

-로버트김 사건도 이중문화권의 산물인가.
“그는 워싱턴 한국대사관 무관에게 정보를 건내주다가 감방에 갔다. 미국시민으로 충성을 다할 것을 선서했으며 미국 공직자이지만 결국은 미국의 반역자가 됐다. 그와 같은 사람때문에 미국의 다수 한국인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한국 위해 일한다는 것을 알면 어떤 미국인이 한국인을 채용하겠나?”

-이민자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민자들에게 한국과 미국 전쟁나면 어느편 들래 하고 물으면 당황한다. 여기서 정체성의 문제가 나타난다. 한국인이라는 오리지널리티가 정체성인 것은 아니다. 정체성은 아이덴티티(동일성)로 불리는데 이것은 아이덴티피케이션(동일시)과는 다르다.

나는 한국인이다 라고 한다면 아이덴티피케이션이다. 내가 이사람이다라는 것을 아이덴티피케이션 즉 신분증, 또는 아이디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와달리 이민자가 미국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사람이 된다면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얻게 된다고 할수 있다.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얻게되면 위의 질문에도 새로운 대답이 나올수 있다.”

-미주세계일보에 대해서.
“초창기에는 통일교의 가정연합이 사회봉사차원에서 시작했다. 지구상에서 한글판 세계일보가 생긴 것은 뉴욕이 처음이다. 그다음에 한국에서 나왔다. 신문사부설 화랑을 경영해서 작가들의 작품활동을 촉진하는 데에 기여했다. 문화행사들을 통해 이민사회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독감 무력감등을 극복할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그동안 해온 일을 더소개한다면.
“미국은 돈이 말하고 표가 말하는(vote talks money talks) 나라이다. 이런 조건에서 동포언론이 한인사회의 정치력을 신장시키고 세력을 규합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신문이 코리안코뮤니티 구성원들이 돈을 잘 벌게 함으로서 다같이 부자가 되도록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부동산 정보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동포언론 기자는 어떤사람인가.
“동포사회 지식인 계층은 그들이 능력을 펼칠 일자리를 찾을수 없었다. 그런데 언론계가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뉴욕의 동포신문사들을 보면 직원 숫자는 미주한국일보와 미주중앙일보가 각각 100명 미주세계일보는 50명정도이다.”

-동포신문 발행 여건은.
“한국에 파키스탄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고 들었다. 만일 그들이 서울에서 파키스탄타임즈라는 신문을 만든다면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겠는가. 뉴욕에서 한인신문을 내는 일은 그것과 같은 일이다.”

-동포언론의 기능은.
“내가 보기에 해외이민사회와 한국사회가 서로 겉돌아 따로가고 있는 것같다. 그래서 동포신문이 그 중간에서 어떤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는 이민자들이 왜 이름을 미국식으로 바꾸는지 왜 한국국적 버리고 미국시민권 얻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같다. 이런 것도 설명해줘야 한다.”

-새로운 매체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신문의 위상 변화는?
“인터넷과 방송등 전파매체들이 신문산업의 전망을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봇물같이 밀려오는 뉴스속에서 신문은 가치있는 정보들을 골라주고 평가하는등 정보를 정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같은 기능이 있으므로 인터넷매체와 경쟁해도 충분히 승산있다고 본다. 그리고 미국 주류 신문에 오른 한국관계기사들이 한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설명해준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고생한 사람이 남 돕는다

동포언론현황취재 2015. 11. 28. 18:30 Posted by 세계로김

고생한 사람이 남 돕는다

[동포언론현황취재 -북미주] 워싱턴 한민족센터 김영자 부이사장

워싱턴=김제완기자  |  oniva@freechal.com

승인 2005.06.15  00:00:00

▲ 워싱턴 한민족센터 김영자 부이사장
 
워싱턴 근교의 군부대 앞에서 21년동안 군복수선을 해오고 있는 김영자씨(63)가 동포들을 위한 한민족센터를 만들고 있다.  워싱턴을 방문한 길에 김씨가 일하는 옷수선점을 찾아가 취지와 추진 경과를 알아보았다.

김씨는 이미 8년전에 워싱턴 근교 로턴 지역에 15에이커(2만3천평)의 부지를 마련해 한민족센터의 초석을 놓았다. 신규이민자를 대상으로 옷수선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돼 이들이 주말에 쉴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김씨의 가게 뒤편에서 구두수선소를 경영하는 이정우씨와 뜻을 같이 하고 힘을 모으고 있다.  

이렇게 소박한 의도로 시작했지만 이름을 한민족센터로 바꾸면서 규모와 의미가 확대되고 있다. 지난 4월 이정우씨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서울에서 '한민족센터 건립위원회 발대식'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문동환목사에게 이사장 자리를 내주고 김씨는 부이사장직을 이정우씨는 집행부 대표를 맡았다. 그리고 문성근씨를 홍보담당으로 김근태 복지부장관을 건립위위원장으로 모셨다. 이미 3년전에 센터 추진사무실을 마련해 상근자도 두고 있다.

김씨는 센터건립을 위한 부지를 구입하기 위해 재봉틀 옆에 노란 저금통을 놓고 10년동안 잔돈을 모았다. 점포의 월세가 부족할 때는 남에게 빌려쓰는 한이 있어도 이 저금통에 있는 돈은 꺼내쓰지 않았다고 한다.

가게 입구 벽에 붙어있는 부대휘장(패치)이 눈길을 끈다. (오른쪽 사진) 21년동안 모았더니 1천여개에 이른다. 이집의 보물이다.

김씨는 이 부대에 근무하는 일등병에서 대장까지 자신이 진급시켜준다. 진급자들이 새 계급장을 달아달라고 찾아오기때문이다. 그가 계급장을 붙여준 군복을 입고 이라크전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다. 1년 넘게 얼굴이 안보이면 전사한 것이라고 말한다. 

김씨는 서울에서 노라노양재학원 2회졸업생으로 재봉틀만진 지 40년 됐다. 지금도 100년전에 만든 재봉틀을 사용한다.

겉보기에는 사회사업을 하는 큰손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지난해 펴낸 자서전 ‘노란두부 저금통’을 읽으면 이루말할수 없는 역경의  드라마를 보는 듯해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다. 

브라질 상파울로에 어린딸을 데리고 이민왔지만 남편은 생활능력이 없어 김씨가 두 딸을 키우면서 생활까지 책임져야 했다. 브라질에서 12년동안 살다가 84년 미국에 와 불법체류자로 생활하는등 갖은 고생을 했다. 김씨의 주위에서는 모진 인생경험이 한민족센터라는 남을 돕는 큰 사업에 나설 힘이 되어준 것같다고말한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국현대사와 함께한 ‘자유의 목소리’

[동포언론현황취재 -북미주편] 워싱턴 미국의소리 한국어방송 한인섭국장

워싱턴=김제완기자  |  oniva@freechal.com

승인 2005.06.15  00:00:00

▲ 워싱턴 미국의소리 한국어방송 한인섭국장 

인디펜던스 애비뉴 330번지에 위치한 미국의소리 방송국을 찾았던 4월초 워싱턴은 벗꽃이 만발해 화사하게 거리가 장식돼 있었다. 미국의 소리 건물은 국회의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었다. 마침 한국어방송 직원들은 실내공사때문에 짐바브웨방송과 함께 2층의 임시거처에 보따리를 풀어놓고 일하고 있었다. 책임자인 한인섭국장은 어수선한 사무실 책상 사이로 기자를 이끌어 국장실로 안내했다.

한국장은 미국의 소리에서 근무하기 위해 71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뒤 10여년만인 85년에 국장으로 승진한 뒤 20년동안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다. 한국에서 미국의 소리를 위해 일한 기간까지 더하면 근 40년을 한길로 가고 있다. 한국어 방송의 상징적인 존재인 그의 이력을 쫒는 것은 이 방송의 활동을 소개하는 것과 다름없을 듯하다.

36년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장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공군 근무를 마치고 65년부터 주한미국대사관 공보원에서 방송담당관으로 일했다. 월남전이 일어나자 미국의 소리 월남 특파원으로 나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69년 닉슨독트린때 닉슨대통령의 동남아 방문과 미드웨이에서 열린 미국-베트남 정상회담에도 동행 취재했다.

미국에 건너온뒤 그의 취재현장은 70년대 남북 대결의 현장이었던  유엔과 한국관계 청문회가 열린 미의회등이었다. 83년 사할린 KAL기 사건도 기억에 남는 사건이었다고 회상한다.
한국나이로 올해 70인 한국장은  아직도 현직에서 근무해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기도 한다. 그의 능력때문이라기보다 미국의 정년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정년이 없어 일할수 있을때까지, 일하고 싶을때까지 (as long as you can work, as long as you want work) 일할수 있다. 

그러나 이제 은퇴를 해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큰 프로젝트 하나는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에게는 작년 통과된 북한인권법으로 대북한방송을 강화시키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다음은 한국어방송 국장실에서 갖았던 질의 답변이다.”

-미국의 소리 한국어방송을 동포방송이라고 할 수 있겠나.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미국정부의 예산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남북한 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이라는 점에서 동포방송이라고 할수 없다. 그러나 기자들을 한국대사관 출입기자단에도 미 국무부의 한국기자 대상 브리핑 때에도 넣어주지 않는다. 그런데 KBS에서 주최하는 동포방송대회에는 참가하라는 초청이 온다. 지난해에는 한국기자협회가 주최하는 재외동포기자대회에도 참가했다. 이외에도 각도시의 통신원을 통해서 매주1회 미주동포소식을 전하고 있다.”

-한국어방송의 역사는.
“미국의 소리는 2차대전중에 개국한 이래 한국의 현대사의 질곡을 같이 해왔다. 42년 2월 개국과 동시에 독일어방송을 시작한 뒤 8월에 한국어 방송을 시작했다. 현재 43개언어방송이 있지만 한국어 방송은 가장 오래된 방송중 하나로 꼽힌다.  일제시대에 단파라디오로 2차대전 전황을 알렸으며 이승만박사가 이 방송을 통해 국내 동포에게 직접 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박사의 육성방송을 인터넷www.voanews.com /korean 으로 들을수 있다. 4.19와 5.16 유신 그리고 신군부 집권과 광주사태등을 지켜보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한국으로 전파를 쏘았다.”

-그동안 한국에 끼친 영향은.
미국의 소리는 해방후부터 71년 까지 아침 6시30분에 국내 라디오방송이 중계했다. 유신이 시작하면서 중단됐는데 기독교방송만이 73년까지 방송을 이어갔다. 당시 내가 전화를 받았는데 기독교방송 담당자가 방송이 끝나고 나서 수신상태가 좋지 않아서 중단한다고 했었다. 그뒤 다시는 서울에서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당시 김대중납치사건과 관련된 정국 경색이 이유였다. 그뒤에는 단파라디오를 통해서만 미국의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한국의 언론자유가 억압당하고 있을 때는 우리방송이 자유의 소리였을 것이다.

-미국의 소리는 그 이름에서 보이듯 미국정부의 입장을 전하는 홍보방송이 아닌가.
“42년 방송을 시작할 때 제일성이 시청자들에게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을 다함께 전하겠다고 했다. 항상 진실만을 전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이것이 아직까지 유효하다. 우리는  미국에 유리한 정보만 골라서 내보내지 않는다. 최근에 이라크전을 보도하면서 부시정부의 입장과 다른 보도가 나가기도 했다.”

-한국어방송 보도 원칙은.
“모두 세가지이다. 객관적인 보도, 미국의 실상에 대한 가감없는 보도 그리고 미국의 대외정책등이다. 이중 세번째 것은 논설(에디토리알)로 현재 나가는 43개언어 방송이 같은 내용을 번역해서 내보낸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정부의 의견이라고 방송전후에 밝히고 있다.”

-어느 기관 소속인가.
“소속기관이 여러차례 바뀌었다.  전시에는 '워 인포메이션' 소속이었으나 전후 국무부 소속으로 그뒤 53년부터는 공보처(USIA) 소속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99년 방송위원회(BBG) 소속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오늘 준비하고 있는 방송내용은 어떤 것인가.
“오늘은 일본인들이 캄보디아 학살지역을 개발해 관광지로 만든다는 소식과 이라크 전쟁 소식 북한의 조류독감 소식등이 나간다. 저녁 방송은 다양하다. 미국은 지금(USA NOW...)이라는 코너와 탈북자 소식, 북한의 창등이 편성돼 있다. 북한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방송시간은.
“한국시간으로 아침 저녁에 한번씩 방송한다. 아침 5시부터 6시까지 저녁 10시부터 12시까지등 3시간을 내보낸다. 이중 50%는 재방송이므로 하루에 1시간 30분을 제작하는 셈이다. 요즘은 단파라디오보다 인터넷으로 듣는 사람이 많아져 방송시간의 의미가 적어졌다. ”

-직원 숫자는.
현재 정규직 12명 계약직 5명등이 일하고 있다. PD 아나운서 기자가 따로 있지 않으므로 일인 3역을 해야한다.”

-자유아시아 방송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전혀 독립된 방송이다. 자유아시아 방송(RFA)은 라디오프리유럽 방송이 모델이 됐으며 지난 96년 북핵문제가 불거지면서 시작됐다. 북한 때리기가 주임무이며 정치적인 성격이 강하다. 하루 4시간 방송하고 기자는 15명정도가 근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국인 있는곳에 ‘아씨’가 있지요”

[초대석] 글로벌 식품 유통기업-‘아씨’ 이승만 회장

김제완기자  |  oniva@freechal.com 

승인 2005.06.01  00:00:00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르는 것이 무엇일까. 혈연이나 언어외에 입맛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김치나 된장찌개를 즐겨 먹는 사람은 누구나 한국인이라는 말도 있다. 과거에는 외국생활중에 김치를 먹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중국시장에서 배추 비슷한 푸성귀와 중국산 젓갈을 구해다 만들면 김치 비슷한 김치가 만들어진다. 외국생활중에 그것조차 즐겨 먹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 애틀랜타 매장 카운터 앞에 선 이승만회장. 아씨식품의 1천600명 직원을 이끌고 한국식품의 세계화에 나섰다. 

그런데 미국에서 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품회사 몇개가 나타난 뒤부터 동포들의 식생활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아씨식품과 왕식품 등이 그것이다.  아씨식품은 지난 3월21일 애틀랜타 지점을 개설했다. 메릴랜드에서 시작해 뉴욕 LA 필라델피아 버지니아등에 이어 열한번째 매장이다. 아씨의 본부가 위치한 메릴랜드 버지니아에는 5~6개의 매장이 있다.

26개국서 수입 30개국 수출

아씨식품의 CEO인 이승만 회장은 불과 열흘전에 오픈한 매장을 혼자서 둘러보고 있었다. 기자는 이회장을 불러세우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깐깐한 인상의 이 회장은 기자가 내미는 본지를 한참 들여다 본 뒤에 인터뷰를 수락했다. 매장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자리를 직원식당으로 옮겨가며 계속했다. 인터뷰하는 중에도 드릴로 나사를 박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매장 한쪽에 한국의 먹자골목같은 푸드코너를 만들고 있기때문이다.

이 회장은 미국 여러 도시의 매장관리는 동생이 하고 자신은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도매업무를 담당한다고 말한다. 26개나라에서 물건을 수입해서 다시 30여개 나라로 수출한다. 이 모든 일을 직원 1600명과 함께 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인이 있는 곳에 아씨가 있다.
매장에 내놓은 일부 식품은 가격이 한국보다 싼 것같았다. 이 회장은 구입원이 국제적이기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세계 곳곳의 식품가격을 파악하고 있어 가장 가격이 싼 지역의 물건을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것. 예를 들어 참깨는 인도에서 오고 수산물은 중국 태국 홍콩등에서, 그리고 참기름은 타이완에서 들어온다. 현미는 미국 것을 사용한다. 가격이 좋고  품질이 좋으면 세계 어느나라에서든 찾아가서 가져온다.

물론 한국에서 오는 물건이 가장 많아서 전체의 40%를 점한다.  한국에서 오는 물건도 대량구매하기 때문에 낮은 가격에 가져올수 있다.  다만 운반비용이 소요되므로 한국과 비슷하거나 약간 비싼 정도에 가격이 형성된다.

아씨에서 취급하는 물건의 가짓수는 이마트보다 더 많다. 식품분야만 보면 한국의 대형 마트의 경우 종류가 500개에서 1천종이지만 아씨는 2만종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재벌급 유통업체도 이렇게 다양한 물건을 갖춰놓지 못한다.

취급품목 이마트보다 많아

아씨가 애틀랜타에 매장을 오픈하고 나서 동포들이 다들 살맛이 났다고 한다. 아씨가 최저가격으로 가격을 선도해나가자 기존의 식품가격이 따라서 낮아지고 있기때문이다. 기자와 동행한 애틀랜타 교포 홍종철씨는 쌀 1킬로그램 짜리를 10달러 이하로 구입하게 된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한다.

쉽지않은 이민생활중에 우리음식이라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에 이 회장은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나아가 교포들을 위한다는 어느 사회단체보다도 그의 회사가 더 동포들을 돕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한 듯이 보였다.

이 회장은 식품의 포장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그 덕에 한국식품 포장 기술이 발전했고 아씨하면 물건 좋고 포장 깨끗하다는 이미지를 얻게 됐다. 요즘은 기술이 발전해서 김치를 병에 넣어도 기포 때문에 깨지지 않는다. 김치는 워낙 많이 나가기 때문에 메릴랜드에 있는 김치공장에서 직접 제조해 각도시에 있는 매장에 공급한다.

식품의 특성상 신문광고 수요가 많은 그는 한때 워싱턴에서 수년동안 동포신문을 직접 발행하기도 했다. 이 경험때문에 광고전략에도 빈틈이 없다.

성균관대 학생회장 출신

애틀랜타매장을 오픈하고 나서 손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첫번째 주에는 한국신문에 두번째주에 중국신문에 광고를 냈다. 지금은 한국인과 외국인 고객의 비율이 7:3정도이다.   

그는 한국인시장만을 상대로 하지 않는다. 그가 취급하는 상표도 각나라마다 다르다. 간장을 예로 들어봐도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의 입맛이 각기 다르다. 그래서 물건도 다를 수밖에 없어 브랜드도 중국 일본시장용을 별도로 만들었다. 중국 브랜드는 이회장의 ‘이’와 중화의 ‘화’를 붙여서 ‘이화푸드’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런식으로 일본에는 ‘하나’ 브랜드, 태국에는 ‘쓰리엘레판’등을 만들었다.  

▲ 뉴욕 플러싱에 있는 아씨 플라자 정문 야경
 
이 회장은 38년생으로 4.19때 성균관대 정치학과 재학중에 학생회장을 지냈다. 당시 데모꾼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4.19 주축멤버인 셈이다. 이승만정권 반대운동을 했던 이승만사장은 4.19때 공이 인정돼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은 바도 있다. 데모 주동자답게 68년에 정치학을 공부하러 미국에 왔다. 그러나 부인이 미장원을 하며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하는 것을 보고 비즈니스에 뛰어들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인구5백명일때 한국일보 시작해

동포언론현황취재- 3. 애틀랜타 한국주간 김학규사장

김제완기자  |  oniva@freechal.com

승인 2005.06.01  00:00:00

  

▲ 한국주간 사옥 앞에 선 김학규 사장
 
애틀랜타 한인신문의 역사는 김학규 한국주간 사장과 함께 해왔다. 김사장은 동포 숫자가 500명에 지나지 않았던 1974년 8월15일 한국일보 애틀랜타 지국을 설립하고 동시에 한국일보 시카고지사로부터 애틀랜타 주재기자 임명장을 받았다. 이때부터 애틀랜타 한국언론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시카고판에 애틀랜타 소식이 실리는 형식이었다.

이당시 한국기독교의 원로 목사였던 한경직 목사를 초청하여 애틀랜타 한인교회에서 부흥 집회를 개최했는데 한국일보 애틀랜타 지국의 첫 뉴스는 바로 이 집회가 그 해 10월에 개최된다는 겻이었다. 한국일보 시카고판에 애틀랜타 지국 명의로 처음으로 실린 광고는 클레어몬트 로드에 위치한 중국식당 골든 부다의 광고였다. 그 이후 여행사와 식품점의 광고가 주로 게재됐다.

김사장은 1977년 7월 경쟁력 강화를 위하여 주간한국 미주뉴스를 격주로 약 2,000부씩 발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애틀랜타 최초의 주간지였다고 할 수 있다.

김학규사장이 나서서 애틀랜타 프레스클럽을 창립한 것은  1986년이었다. 한국일보를 비롯해 중앙일보(지국장 한영상), 조선일보(지국장 한만희), 세계일보(지사장 이준남)등이 회원사로 모였다, 김사장이 초대회장으로 선임됐다. 프레스클럽은 89년12월 한인회장 선거전이 삼파전으로 경합되었을 때 후보 토론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또한 1992년 1월부터는 김사장이 주간한국을 재발간하고 이것이 1996년부터는 한국주간으로 제호를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사장은 96년 한국일보와 결별했다. 그는 서울에서 찾아온 기자에게 당시의 일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이미 94년부터 경쟁력 강화를 위해 LA에 있는 미주 본사가 직접 경영해야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김사장에게 월급쟁이사장으로 물러나라는 압력이었다. 이미 74년부터 22년동안 황무지를 일궈온 김사장은 반발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1년에 2만불씩 권리금을 44만불을 내라고 요구하며 버텼다. 그렇게 본사와 갈등관계가 2년이상 지속됐다.

그러나 그뒤 발생한 한 사건으로 결국 경영권을 내놓게 됐다. 당시 김사장은 한인타운 번영회와 함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열어 미스 애틀랜타를 선발했다. 미스코리아는 한국일보가 전통적으로 주최해온 행사였다.

그런데 미주본사에서 허락 없이 뽑았다면서 무효화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이때문에 미스 애틀랜타로 선발된 아가씨의 부모는 김씨를 사기죄로 고소하겠다고 했으며 신문의 공신력이 크게 떨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김씨는 LA에 달려가서 장재구회장을 만났다. 그리고 미스코리아사건 사태수습을 하는 조건으로 일간지를 포기하기로 타협하게 됐다. 다만 주간지만 챙길 수 있었다.           

애틀랜타=김제완기자

 

애틀랜타한인이민사 발행

김학규사장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한 ‘애틀랜타한인이민사’는 2002년에 발행됐다. 여러 지역의 동포사회에서 한인이민사를 펴내려고 하지만 능력이 닿지 못해 좌절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현실에 비춰보면 애틀랜타는 행복한 경우에 속한다.

애틀랜타한인회가 나서서 한인이민사 편찬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집필은 조지아대학에 유학했던 경상대 이전교수가 맡았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