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5백명일때 한국일보 시작해

동포언론현황취재- 3. 애틀랜타 한국주간 김학규사장

김제완기자  |  oniva@freechal.com

승인 2005.06.01  00:00:00

  

▲ 한국주간 사옥 앞에 선 김학규 사장
 
애틀랜타 한인신문의 역사는 김학규 한국주간 사장과 함께 해왔다. 김사장은 동포 숫자가 500명에 지나지 않았던 1974년 8월15일 한국일보 애틀랜타 지국을 설립하고 동시에 한국일보 시카고지사로부터 애틀랜타 주재기자 임명장을 받았다. 이때부터 애틀랜타 한국언론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시카고판에 애틀랜타 소식이 실리는 형식이었다.

이당시 한국기독교의 원로 목사였던 한경직 목사를 초청하여 애틀랜타 한인교회에서 부흥 집회를 개최했는데 한국일보 애틀랜타 지국의 첫 뉴스는 바로 이 집회가 그 해 10월에 개최된다는 겻이었다. 한국일보 시카고판에 애틀랜타 지국 명의로 처음으로 실린 광고는 클레어몬트 로드에 위치한 중국식당 골든 부다의 광고였다. 그 이후 여행사와 식품점의 광고가 주로 게재됐다.

김사장은 1977년 7월 경쟁력 강화를 위하여 주간한국 미주뉴스를 격주로 약 2,000부씩 발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애틀랜타 최초의 주간지였다고 할 수 있다.

김학규사장이 나서서 애틀랜타 프레스클럽을 창립한 것은  1986년이었다. 한국일보를 비롯해 중앙일보(지국장 한영상), 조선일보(지국장 한만희), 세계일보(지사장 이준남)등이 회원사로 모였다, 김사장이 초대회장으로 선임됐다. 프레스클럽은 89년12월 한인회장 선거전이 삼파전으로 경합되었을 때 후보 토론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또한 1992년 1월부터는 김사장이 주간한국을 재발간하고 이것이 1996년부터는 한국주간으로 제호를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사장은 96년 한국일보와 결별했다. 그는 서울에서 찾아온 기자에게 당시의 일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이미 94년부터 경쟁력 강화를 위해 LA에 있는 미주 본사가 직접 경영해야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김사장에게 월급쟁이사장으로 물러나라는 압력이었다. 이미 74년부터 22년동안 황무지를 일궈온 김사장은 반발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1년에 2만불씩 권리금을 44만불을 내라고 요구하며 버텼다. 그렇게 본사와 갈등관계가 2년이상 지속됐다.

그러나 그뒤 발생한 한 사건으로 결국 경영권을 내놓게 됐다. 당시 김사장은 한인타운 번영회와 함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열어 미스 애틀랜타를 선발했다. 미스코리아는 한국일보가 전통적으로 주최해온 행사였다.

그런데 미주본사에서 허락 없이 뽑았다면서 무효화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이때문에 미스 애틀랜타로 선발된 아가씨의 부모는 김씨를 사기죄로 고소하겠다고 했으며 신문의 공신력이 크게 떨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김씨는 LA에 달려가서 장재구회장을 만났다. 그리고 미스코리아사건 사태수습을 하는 조건으로 일간지를 포기하기로 타협하게 됐다. 다만 주간지만 챙길 수 있었다.           

애틀랜타=김제완기자

 

애틀랜타한인이민사 발행

김학규사장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한 ‘애틀랜타한인이민사’는 2002년에 발행됐다. 여러 지역의 동포사회에서 한인이민사를 펴내려고 하지만 능력이 닿지 못해 좌절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현실에 비춰보면 애틀랜타는 행복한 경우에 속한다.

애틀랜타한인회가 나서서 한인이민사 편찬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집필은 조지아대학에 유학했던 경상대 이전교수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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