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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 기사

이도영회장 미주한인사회의 조지 워싱턴으로 불려

이도영회장 미주한인사회의 조지 워싱턴으로 불려 
미주총연 창립 산파역 워싱턴한인회장 세차레 역임 유례없는 기록 남겨
 

 2008년 10월 12일 (일)  세계로   
 
     

▲ 이도영회장-세계로사진  
 

160여개 미주한인회들의 연합체인 미주한인회총연합회를 만든 사람, 워싱턴 한인회장을 세차레 역임한 사람이 있다. 이같은 유례를 찾을수 없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현재 78세의 이도영 회장이다. 한인사회의 조지 워싱턴이란 말을 듣는 사람이다.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워싱턴한인코뮤니티센터건립위원장을 맡고 현역에서 뛰고 있다.

이회장이 지난 8월26일 열린 연길국제박람회 참관하는 길에 서울에 왔다. 지난달 분당의 한 까페에서 이회장과 그의 부인 그레이스 리씨를 만나 워싱턴 한인사회에서 그의 활동을 들었다.

60년 이민 이후 워싱턴에 줄곧 거주해

이회장은 60년 유학생으로 워싱턴에 온 이래 근 50년동안을 이도시에서만 거주하고 있다. 다른 도시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이민이 시작되고 한국이민자들이 몰려오자 그가 공항에 마중나가 많은 사람들의 이민보따리를 들어주고 임시거처로 값싼 호텔을 소개해주었다. 미국 동포들의 직업은 공항에서 이민가방을 들어준 사람의 직업을 따라간다는 말이 있다. 이미 68년에 가발가게를 시작한 그는 많은 이민자의 직업을 인도했을뿐 아니라 이민자들의 큰 선배로 남아 있게 됐다. 70년대부터 이민보따리 들어준 사람들에게는 이민사회의 고참 선배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인회장을 세차례 역임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첫번째 워싱턴한인회장은 73년 10월에 당선돼 1년임기를 마쳤다. 그뒤 연임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 소극적으로 운동을 했더니 불과 몇표 차이로 낙선했다. 첫 임기중에 이회장은 워싱턴한인회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유태인이 소유한 4층건물을 구입했다. 건물위치는 워싱턴한국대사관으로부터 세 블럭 상거한 곳에 있었다. 태극기가 걸려있는 이 건물을 바라보면서 워싱턴의 한국이민자들은 가슴이 뿌듯해지는 감회를 느꼈다.

그로부터 3년뒤 76년말에 다시 워싱턴한인회장에 당선됐다. 두 번째 회장을 하기전에 회칙이 개정돼 한인회장 임기가 2년으로 늘어났다. 당시동포사회가 1년은 배우고 1년은 일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 부인 그레이스리씨와 함께 했다  
 

이때의 대표적인 치적이 바로 미주한인회총연합회 창립이다. 두번째 임기가 막시작되던 77년 1월12일 워싱턴 한인식당 우래옥에서 미주 13개 지역한인회장들이 모여서 결성했다. 이회장은 창립동기를 묻자, 각지역 한인회는 주정부를 상대하지만 연방정부를 상대해야 하는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거주하다보니 자연스레 이같은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이때는 지미 카터정부시기였는데 카터대통령이 전보로 축하전문을 보내왔다. 참석못해 미안하지만 성공을 축하한다는 요지의 전문이었다.

77년 1월 워싱턴에서 13개지역한인회장 모아 미주한인회총연합회 출범시켜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이런 큰 조직을 출범시킨 것에 의아한 생각이 든다. 이회장은 첫 번째 임기중에 이미 연합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때부터 뉴욕 필라델피어등 각지역 회장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미주총연 2차총회는 시카고에서 열렸다. 2대회장은 시카고에서 3대는 LA에서 맡았다. 현재 민주당 의원인 박지원씨는 당시 뉴욕한인회장으로서 4대 미주총연을 이끌었다. 박의원은 이회장과는 같은 가발업을 해서 서로 잘 알고 지냈다고 말한다. 5대는 필라델피아회장이 맡았고 이때부터 임기가 2년제로 바꿨다.

두 번째 한인회장이던 77년에 워싱턴기념탑 부근에서 한인의 날 행사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10월3일 개천절에 날을 잡았는데 기후도 좋아 행진하기 알맞은 날씨였다고 한다. 7월4일 미독립기념일과 한국의 개천절이 한인회의 주요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세번째 한인회장은 91년부터 2년간이었다. 이당시 워싱턴지구 한인회가 셋으로 갈라졌는데 이때 세 개의 한인회를 한데 묶어야 한다는 기치를 들고 나섰다. 그래서 지금의 워싱턴한인회연합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회장은 조직을 두 번 만들어 초대회장을 두 번이나 하게 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분열로 인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다. 하나는 창립이었고 다른 하나는 통합이었다.

세 번째 회장 시기에 기억남는 일은 미연방정부가 워싱턴에서 주최하는 행사중에 각주마다 소수민족 단위가 참여하는 퍼레이드 경연대회가 있었는데 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든 일이다. 91년에는 퍼레이드중에 거북선을 만들어 2등을 차지했고 92년에는 메이플라워호 배를 만들어 전국에서 1등을 차지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면 안된다는 신념이 약이 돼

그의 한인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은 지금도 계속된다. 2005년에 시작된 주미공사관 재매입운동 관련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구입을 못하고 집값만 올려놨다고 아쉬움을 토한다. 돈을 기껏 모아도 후임자들이 관리를 잘못했다. 지금은 사실상 포기상태라면서 이제는 한국대사관에서 할일로 남겨두었다고 말한다.

지금 맡고 있는 직책은 워싱턴한인코뮤니티센터 건립추진위원장이다. 동포들의 화합을 위해 필요한 사업이라 생각했던 터에 위원장으로 추대돼서 맡게 됐다고 말한다. 코뮤니티센터 건립기금을 3천만불을 모으면 주정부 연방정부에서 보조받아 6천만불 만들수 있다. 앞으로 10년은 더 모아야 할 것같다. 좋은 사람 열명만 모으면 되는데 지금까지 다섯명을 모았다고 말한다.

세계 어느나라든 한인사회에서 일을 하다보면 질시와 모함 때문에 상처받고 떠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도 이처럼 오랫동안 일을 해온 것이 특이한 사례로 남을 만하다. 그는 이에 대해서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면 안된다는 신념이 약이 된 것같다고 말했다. 그가 늘 염두에 두는 것은 사랑 희생 봉사이다. 침례교회 안수집사이지만 그동안의 봉사활동이 신앙활동이나 선교활동 차원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회장은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했지만  주로 서울에서 성장했다. 정일권장군 밑에서 군대생활을 했으며 지금 고려대학으로 통합된 국학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60년 유학생으로 도미한 뒤, 조지타운대학에서 외교학을 공부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때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회사가 가발을 취급했는데 이 회사에서 구매담당으로 일하면서 가발업에 인연을 맺은 뒤 평생의 가업이 됐다.

김제완 기자 toworld21@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