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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세계일보

재외동포 특례법안 둘러싼 논의에 문제있다

재외동포 특례법안 둘러싼 논의에 문제있다 
 

1998년 09월 15일 (화)  시사저널  111 
 
 

오니바 59호, 98년 9월15일
재미동포사회 ▶ 이중국적에 치중 참정권 회복에는 소흘


세계각국에 나와 사는 한국동포들은 모두 5백30만명으로 본국인구대비 비율로 보면 이스라엘 다음으로 많고 절대숫자로 보면 중국 이스라엘 다음이다. 지난 8월24일 530만 재외동포들의 한국내에서의 법적 지위를 담은 특례법안이 법무부에 의해 마련돼 발표됐다. 동포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이중국적과 참정권에 관한 전향적인 법률안이 나오면서 이에 반대하는 국내의 여론이 높다.

병역 납세등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찾으려 한다는 것이 일반의 여론이고 외무통상부는 외교적인 마찰을 이유로 이에 반대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본지 편집인의 글을 소개한다.


지난 95년11월 빠리에서 발간되는 <르빠리지엥>지에는 한국인들에게 의미있는 사진기사 하나가 실렸다. 알제리사람들이 빠리 근교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장면이었다. 사진 아래에는 이들이 알제리 대통령 선거에 한표를 행사하기 위해 투표함 앞에 늘어서 있다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이 기사를 우연히 보게됐던 프랑스유학생 김명호씨(32)는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아, 이들은 외국에 나와서도 자기나라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하는구나. 사회학을 전공하면서도 그는 외국에서도 한국의 각급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그후 유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경험을 전하자 다른 한 동료는 미국 시민권자인 친척 한분이 빠리에 와서도 선거를 하러 미국대사관에 가더라는 말로 맞장구를 쳤다.

 해외동포나 유학생들은 그동안 현지국가나 한국의 선거철에 구경꾼으로 남아있으면서도 뭔가 잘못됐다는 인식에 이르지 못했다. 이민이나 유학 목적으로 한국을 떠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의 일들은 다 잊고 새로운 생활에 맞부딪치며 적응해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게 마련이다. 그 와중에 해외에 나가서까지 한국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은 뇌리의 어느 부분에도 자리잡지 못한다.

그러나 알제리와 같이 정치적으로 한국보다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는 나라도 재외국민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선진국 정상회의(G7) 참여국가들중 대부분 나라가 선거권을 부여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선거제도를 발전시켜왔다. (하단의 기사 참조)

이중국적 문제도 마찬가지다. 로스엔젤레스에 소재한 한국인권문제연구소가 지난 94년에 출간한 '귀화동포와 이중국적 문제'라는 백서에는 조사대상 62개국중 절반가량의 나라들이 이중국적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더욱이 이런 추세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도 이 백서는 지적하고 있다.

이 백서의 저자인 재미동포 차종환박사가 이중국적 확보를 위해 가장 열심히 일해온 사람들중 하나라는데 대해 교포사회에서 별다른 이론이 없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말을 한다. "과거에는 목포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12시간 걸렸지만 지금은 미국에서 서울까지 10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제 태평양은 단지 하나의 호수로 변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과 해외가 이처럼 일일생활권으로 가까워졌는데 해외동포들을 외국인으로 대해야겠는가."

법무부가 8월25일 발표한 '재외국민 특례법안'에는 그동안 재외동포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바를 받아들여 법적 지위에 관한 여러 가지 전향적인 조치가 담겨있다. 우선 이중국적을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내용상으로는 이에 버금가는 수준의 각종 혜택이 담겨있다. 이에 대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해외동포사회는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특례법안을 들여다 보면 참정권에 관해서는 허용한다고 생색만 냈을 뿐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내용이 담겨있다. 선거가 실시되기 30일전부터 국내에 체류하는 재외국민들에 한해서 투표권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한달전부터 국내에 들어가서 기다릴 해외동포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에 실망한 유럽의 동포사회에서는 이번 특례법안에서 참정권 문제를 제외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것은 재외국민의 법적 지위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활동해온 미국동포들이 이중국적 문제에만 관심을 집중한 데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미국과 달리 이민제도가 없고 현지국적 취득자가 적은 유럽의 현실에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보인다. 이 운동을 주도해온 미국동포사회의 지도급 인사들 다수가 시민권자이므로 실현되더라도 해당범위에 들지 않는 참정권 회복보다는 재산권 행사등 실리적인 문제가 걸린 이중국적 문제에 관심을 더 기울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재미동포 사회가 이중국적에 기울인 에너지를 참정권 회복운동에 우선해서 사용했더라면 지난해 대선에서 투표를 하게 됐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 당시 대선주자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재외동포 참정권문제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확보한 '표'로서 정치권에 호소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조건에서 이중국적 문제를 거론하게 됐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교포사회의 젊은 층중에는 부모세대가 한국의 각급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했던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난 60년대 해외동포들은 한국대사관으로부터 보내온 투표용지를 받아들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당시의 영화관에서 상영하던 '대한 뉴스'에서 파월장병과 파독 광부 간호원들이 현지에서 투표를 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선거권이 지난 72년10월 유신선포와 함께 사라졌다. 유신헌법에 의해 국내에서도 직접선거권을 박탈당했으며, 이때 개정된 국회의원선거법 제19조 2항에 부재자신고 대상을 '국내거주자'로 한정하는 문구가 삽입됨으로서 재외국민들의 선거권 행사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것이다. 박정희정권이 야당성향의 동포들 표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 폐지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민주화된 시대에 악법개폐의 차원에서 원상회복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해외의 목소리를 국내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김제완 편집인 시사저널 1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