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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불대사 이수영 의문사

'전프랑스대사 의문사' 기각 재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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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프랑스대사 의문사' 기각 재고해야

진정인이 진상규명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


01.10.20 18:13l최종 업데이트 01.10.22 09:38l

김제완(oniva)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양승규 위원장님께

 올해 초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접수한 83건의 사건 중에 유일하게 해외에서 발생한 사건의 진정인입니다. 지난 93년부터 빠리에서 동포신문 '오니바'를 펴내온 저는 지난해 연말경, 72년 4월 프랑스주재 한국대사가 의문사한 사건에 대해 취재해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능력으로는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위원회에서 조사를 해달라고 진정했었지요.

이 문제에 대해 지난 9월 1일에 발표한 귀 위원회의 판단 결과는 기각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기각 결정문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합니다. 이 지적들이 합당하면 기각결정을 재고해주기를 바랍니다. 재고 또는 재심사가 불가능하다면 적절한 해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에펠탑과 세느강의 도시, 낭만과 자유의 도시로 알려진 파리는 한국의 현대사와 관련된 여러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난 도시이기도 합니다. 67년의 이응노 화백을 비롯한 유학생 납치사건과 79년의 김형욱 실종사건 그리고 같은 해 발생한 재불교포 이유진 간첩조작사건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모두 다 중앙정보부가 관련된 사건들입니다. 이같은 일이 일어났던 빠리에서 유신 직전인 72년에 발생한 프랑스주재 한국대사 이수영의 의문의 죽음은 정치적인 배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담당 조사관들은 이같은 역사적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까지 충분히 이해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진정인인 제가 보기에 조사 결과는 크게 미흡한 것이었습니다만, 미비한 법으로 인해 제한된 조사기간에 쫒기는 조사관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는 점도 인정이 됩니다. 또한 가족이 나서서 조사관들을 독려, 재촉하지 못했고 진정인조차 한국에 있지 않아 사실상 이 사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는 점도 이처럼 불충분한 조사결과가 나오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재대로 조사를 하지 못했다면 최소한 미제사건으로 남겨 놓았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언젠가 증거가 나타나면 다시 조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사건의 기각결정은 귀 위원회가 담당한 83건 중 가장 먼저 나온 판단들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이처럼 성급하게 기각 결정을 내린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진정인은 이같은 결과가 나온 것은 무엇보다 관련법규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반인륜적인 범죄사건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두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법개정을 통해 공소시효를 없애고 시간을 충분히 갖고 역사앞에 진실을 밝힌다는 자세로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위원장님도 동의하실 것으로 믿고 말씀을 더 드리지 않겠습니다.

사건해결의 열쇠인 유가족도 프랑스 공식기록도 못찾아

 이수영 사건은 의문사위원회에서 담당하고 있는 사건 중에서 드물게도 진정인이 가족이 아닌 제3자인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위원회의 조사활동의 대상으로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은 이수영의 자녀 등 유가족들의 진술을 받는 일입니다. 직계 가족이야말로 사건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아울러 한국의 공권력에 의한 타살 가능성이 있다면 당시 박정희정권 치하의 다른 국가기관의 조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 경찰당국의 조서를 확보하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가 의혹의 문을 열고 진실에 이르기 위한 열쇠입니다.

그러나 7개월 동안의 조사기간 동안 의문사위는 미망인과 두 아들 딸등 네 명의 직계가족과 이수영의 형의 자녀 등 방계가족들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위원회 조사관들은 이수영의 딸 이마리가 LA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지난 6월 그를 만나러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집을 비워서 만나지 못했다는군요. 특기할 점은 조사단이 미국 LA를 방문하기 직전 이마리가 청와대에 진정서를 내어서 조사를 받지 않도록 해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증언들에 의하면 이마리는 사건 당시 이수영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종의 추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며 그분의 명예에도 관련된 일이어서 상술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마리는 이 문제로 인해 치유하기 어려운 심적 고통을 겪어왔을 것입니다. 조사관들의 조사를 회피하기 위해 진정서를 제출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조사관들은 진정한 사유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담당 조사관은 이마리 외에 다른 가족들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 컴퓨터에 입력돼 있지 않으므로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될 뿐 찾을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수십년 전의 사건현장을 찾아서 발로 뛰어온 다른 조사관들과 비교되는 태도입니다. 이마리 외에도 이수영의 미망인과 아들이 둘 있습니다. 이마리보다는 그의 오빠인 이영일이 객관적인 진술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이수영의 형이 서울에 거주했으므로 인척들이 한국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가족과 인척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의혹의 문을 여는 또 하나의 열쇠인 프랑스 정부의 관련 서류도 입수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6월 18일부터 5일 동안 담당 조사관 세 명이 빠리에 출장조사차 나왔으나 교포들의 증언을 청취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 뿐 프랑스 관계기관의 자료는 입수하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경찰의 당시 수사자료 요구에 대한 프랑스 외교부의 공식적인 답변은 지난 4월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에 전해졌습니다. 10년간의 보존기간이 지나 서류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외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의 성격으로 보아 이수영 사건 수사는 경찰보다 상급 기관인 프랑스 정보기관에서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조사관들은 빠리에서 이 기관과 접촉 시도조차도 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발견된 것은 한국 검찰자료에 첨부돼 있는, 프랑스 의사가 작성한, 자살로 보인다는 내용을 담은 검안기록뿐입니다. 한국 검찰의 수사기록도 보존기한이 지나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처럼 두 가지 열쇠중 어느 하나도 손에 쥐지 못한 채 왜 그리 급하게 기각 결정을 했을까요? 그리고는 본질과 관련이 적은 문제들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기각 결정문의 오류와 왜곡

 위원회의 기각 결정문은 진정인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며 세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1) 진정인은 프랑스 교포신문인 오니바신문 발행인으로 사망 당시 프랑스에 없었고, 회고록·현지 신문·교포들 사이의 떠돌던 소문 등을 확인 절차 없이 막연히 추측만 가지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에 부합되는 증거가 전무하다.
 (2) 진정인은 이수영의 등 부분에 자상이 7군데나 있었다는 풍문에 따라 타살을 주장하나, 위에서 인정한 바와 같이 사체검안서, 사체 해부감정서에 의하면 등 부분이 아니라 흉부에 세 군데의 자상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3) 이수영의 부친 이익항에게 범인 도피 가능성을 제보했다는 한묵은 자신이 과거 대사관 광복절 기념행사장에서 진정인이 묻기에 이익항이 수사의뢰를 하였다는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오니바신문 기사 내용과 같이 대사관에서 발행해 준 여권을 가지고 미국으로 간 사람이 이수영을 죽였다고 말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같은 이유들은 진정인으로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조사관들은 가족의 진술과 프랑스정부 관련서류 등을 통해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려 하지 않고, 진정인이 제기한 의혹들을 쫒아간 뒤 그것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마치 저 산을 보라고 가리켰더니 산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는 꼴입니다.

위원장님 생각해보십시오. 진정인이 제기한 의혹이 사실로 인정될 수 없다면 이수영은 공권력에 의해 타살됐다는 혐의가 없어지는 것입니까? 위 이유 중 두 번째인 경우를 보십시오. 등이 아니라 가슴에 자상이 발견됐다는 것은 그 동안 조사결과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진정인이 취재한 교포의 증언이 잘못된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공권력에 의한 타살이 아니라는 이유로 꼽을 수 있는 것입니까. 결정문의 기각 이유는 아주 기초적인 논리상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로 결정한 이상 위원회에서 자발적으로 증거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조사관들이 그러한 노력을 충분히 했는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사례를 보면 진정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진정인은 그 동안 단 한차례도 그의 죽음이 공권력에 의한 타살이라고 주장한 바가 없습니다. 다른 사건들과 달리 제3자인 진정인은 그렇게 주장할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의혹을 제기했고 다시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었죠. 그런데 이같은 의혹제기를 "주장"이라고 하며 길지 않은 결정문에서 세 차례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장"을 반박했으니 진정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이수영도 공권력에 의한 타살로 볼 수 없다는 식입니다. 이거 말이 안됩니다.

그런데 결정문의 기각 사유는 진정인이 제기한 의혹을 정면으로 논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의혹을 갖게 된 결정적인 근거라고 밝혔던 르몽드지의 두 차례에 걸친 보도 내용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 부분에서 조사관들의 자의적인 조사 태도가 잘 나타납니다. 프랑스에서 뿐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공신력을 인정받는 르몽드를 "현지신문"이라고 표현하고 교포사회에서 떠도는 소문과 나란히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진정인의 "막연한 추측"의 근거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결정문의 다른 부분에 르몽드가 한차레 직접 언급돼 있습니다. "대사관 식모였던 강옥순 및 현장에 갔던 르몽드 기자 등은, (...) 현장에 (...)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다고 말한 대목입니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기자는 르몽드가 아니라 르피가로 기자인 것임은 여러 증언에 의해 확인된 사실입니다.

앞에서는 이수영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르몽드를 "현지신문"이라고 기록한 반면, 당시 이 사건을 단순자살이라고 보도했던 우파지 르피가로신문의 기자를 르몽드 기자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조사관들의 실수로만 보기에는 너무나 공교롭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조사관들이 이수영의 죽음에 대한 예단을 갖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진정인이 의혹을 갖게 된 동기는 르몽드 기사

 진정인이 이수영 전대사의 자살에 의혹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벌써 4년여 전입니다. 그러나 교포들 사이에 떠도는 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뒤 2000년 1월, 재불교포 이유진 씨의 간첩조작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던 중 이 사건을 보도했던 르몽드 신문 79년 8월 26일자 기사를 접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이 기사는 당시 중앙정보부의 대표적인 활동 세 가지를 거론했는데 김대중 납치사건, 동백림사건, 그리고 이수영 대사의 죽음이 그것입니다.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부엌칼에 찔려 죽임을 당한 대사의 자살"이라는 모순어법의 표현을 사용한 것이 특이했습니다. 아마 프랑스 경찰이 이미 공식적으로 자살로 발표한 사건이기 때문인 듯했습니다.

이 기사에 충격을 받은 저와 동료들은 사건 당시의 르몽드 기사를 찾았습니다. 사건 발생 나흘만인 72년 4월 25일자에 실린 르몽드 기사는 "한국대사의 자살, 의혹으로 남아"라는 제목으로 몇 가지 사망원인을 거론했고 그중에 하나로 대사관내 정보기관과의 갈등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이같은 일은 국가기관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사안이라고 보고 귀 위원회에 진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진정서에도 이 사실을 적시했으며 르몽드의 기사들을 주요 팩트로 사용해 작성한 기사(오니바신문 2000년 12월 1일)도 함께 제출했습니다. 그 이후 시사저널 2001년 1월 11일자와 오마이뉴스 2월 2일자에 제가 기고한 관련 기사도 르몽드 기사가 주요근거였습니다.

관련기사-전 주불대사 이수영 자살사건 재조사해야

 그러나 기각 결정문에는 르몽드의 지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도 단순한 수사상의 실수로 보아야 할까요.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빠져 버린 것을 그렇게 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공권력에 의한 타살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이에 따른 불필요한 논란을 일어날까 두려워서 르몽드의 보도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위원장님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 신문에서 왜 그같은 보도를 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관들의 빠리 출장기간중에 조사대상에 놓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조사관들의 주요활동은 당시 빠리에 있었던 교포들을 만나 이 사건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되새겨내 진술을 받은 것뿐입니다.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들로부터 29년전 사건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내서 얻은 진술이 어떤 증거능력을 갖겠습니까. 오히려 조사에 혼선만 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기각 이유로 거론된 재불교포 한묵의 진술 관련사항이 그렇습니다. 지난 4월 진정인이 위원회에 출두해 조사를 받으면서 그가 자기의 말을 번복하고 있어 증거로 삼기가 어렵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위에서 보듯 한묵이 자신의 말을 번복하고 있는 것을 들며 진정인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군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같이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는 위원회의 결정문은 대통령소속기관의 결정문으로서의 품격이나 유효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봅니다. 나아가 이처럼 문제투성이의 결정문이 어떻게 작성될 수 있었는지 그것 자체가 또하나의 의혹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가정불화로 인한 부부싸움 끝에 자살을 했다 하더라도 일국의 대사가 부엌칼을 벽에 대고 스스로 몸을 부딪쳐 가슴을 세 차례 찔려 사망했다는 것은 여전히 어색해 보이고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자살을 할 때 스스로 세 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칼로 가슴을 찌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법의학자들 사이의 상치된 견해들도 언급돼 있지 않았습니다. 위원장님, 이 결정문은 귀 위원회의 명예와 권위에 누가 될 만큼 흠이 많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기각 결정을 재고해주시기를 바랍니다.

2001년 10월17일
 프랑스 빠리에서 진정인 김제완 드림

 의문사위, 이수영사건 각하 결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