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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불대사 이수영 의문사 '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12.16 등에 칼 꽂고 자살했다?
  2. 2015.12.16 전 주불대사 이수영 자살사건 재조사해야
  3. 2015.12.16 '전프랑스대사 의문사' 기각 재고해야

등에 칼 꽂고 자살했다?

주불대사 이수영 의문사 2015. 12. 16. 13:32 Posted by 세계로김

등에 칼 꽂고 자살했다? 
파리·김제완 통신원 | 승인 2001.01.11(목) 00:00|585호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95

1972년 프랑스 주재 이수영 대사 의문사…중앙정보부 '소행' 가능성 제기돼

1987년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때 '리옹의 백정' '나치의 앞잡이'로 불렸던 클라우스바르비를 체포했다. 프랑스인들은 공소 시효가 지났지만 바르비를 처벌하려고 예외적으로 공소 시효를 두지 않는 '반인륜죄'라는 죄목을 만들어 법의 심판을 받도록 했다.

2000년 1월15일 한국에서는 개혁입법 차원에서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통과되었다.이 법에 따라 과거 권위주의정권에서 발생한 의문사의 진상을 밝혀내기위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10월17일 현판식을 갖고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은 공소 시효가 지난 사건까지 다룬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반인륜법과 비교할 만하다.

1972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한국대사 자살 사건은 그동안 재불 한인사회에서 풍설로 떠다니며 의문과 의혹을 키워왔다.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사해야한다는 것이 당시 사건을 지켜보았던 재불 한국인의 생각이다. 특히 이 위원회에 조사 신청을 하는 시한이 특별법에 2000년 12월 말로 규정되어 있어 더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1972년 4월21일 오전 6시께, 프랑스 주재한국대사 이수영(李壽榮)씨가 파리 몽테뉴가7번지 대사관저에서 쓰러졌다. 신음하는 그를 발견한 부인이 경찰에연락해, 앰뷸런스로병원에 옮기던 중 이씨는 숨을 거두었다. 한국대사관은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이라고 밝혔다가 곧 자살이라고 수정했다. 로이터통신은 프랑스경찰도 이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4월24일 전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르몽드>는 다른 의문을 제기했다. 사건 발생 4일 뒤인 4월25일 <르 몽드>는 '설명되지 않은 한국대사의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몇 가지 취재 정보에 따라 의혹을 짚어나갔다. <르몽드>는 우선 '자살 동기를 사적인 데서 찾을 수있다'며 그가 전처소생 장녀와 부인 사이에 갈등이 심해 고심해 온 사실을 지적했다. 또한 '이대사가조만간 서울에 돌아갈 채비를 하고있었다'며 직무상곤란한 처지에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마지막으로 또 다른 소식통을 인용해, 이대사가 '대사관 정보기관과 협조 관계에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자살로 볼 수 없는 여러 의혹과 증거

<르몽드>는 또 같은 날짜기사에서 이대사가 사망하기 전 그를 만났던 동료들이'특별히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고 한증언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대사는 '사망 전날까지도 업무가 밀려 야근을 했다'며, 몇시간 후에자살을 결행할 사람에게서 나타나기 마련인 징후가 보이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외교관들이 '이대사가 우울증에시달려 왔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4월24일 이후로 어찌된 일인지 이 신문은 후속 보도를 하지 않았다. <르몽드>에 이 사건이 다시 등장한 것은 7년뒤인 1979년 8월26일이다. 당시 한국과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영길 사건'을 보도하면서1972년 터진이대사 사건이 다시 언급되었다. <르몽드>는 이사건이 한국중앙정보부(KCIA)와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1967년 동백림 사건 때파리에서 유학생들을 불법으로 송환해간 일, 1971년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그리고 1972년의 이수영 대사 자살 사건을 들었다.르몽드가 두 차례나 이수영씨의 자살에 중앙정보부가 관련되었다고 지적하는 동안에도 한국 언론은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이대사의 죽음이 <르몽드>가 의혹을 제기한 대로 중앙정보부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당시 공식 발표처럼 가정불화를 비관한 자살인지 현재로서는 명확하게 가려내기 어렵다.

다만 이 사건이 일어났던때의 정황을 되짚어보면 진실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1972년은 격동의 해였다. 특히 그 해 10월17일 박정희 정권이유신을 선포해 국내 정정이 불안해지자 해외에서 활동하던 외교관들도 동요했다. 당시미국 주재한국대사관 공보관장인 이재현 공사가 미국으로 정치 망명한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수영씨는 1953년 판문점휴전회담에서 한국측 대표로 활동하다가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는 1943년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졸업한 이후 해방된 뒤에 입대했기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군 출신과는 색깔이 달랐던 사람이다.이동원 전 외무부장관의 회고록 <오프 더 레코드>에는 박정희와 이수영 사이의 갈등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 결국 프랑스 대사에는 베테랑 이수영씨가 임명되었지만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박대통령은 '이수영'이라는말을 듣는순간 "그 친구는 무조건안돼!" 하며고개를 내저었다. 사연인즉, 이대사가 1964년 5월부터 잠시공보부장관으로 일할 때 발생한언론 파동 때문이었다. 당시 공화당이 신문윤리위원회 권한을 확대해 언론을규제하려 하자전언론이 일어나 반대했는데 이때이대사가 언론편에 기울어 박대통령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이같은 배경을 두고 짐작해보면 그의 죽음이 가정 불화에의한 자살이 아닐수 있다는 추론에 이르게 된다.이수영씨의 아버지 이익항씨도 아들의 죽음에 의문을 갖고 1972년 7월3일 서울지검에수사의뢰서를 제출했다.그는 이 의뢰서에서 '사인이 가정 불화로 인한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믿어지지않고 풍설에 의하면 타살 혐의가 있다고 하니 당국이 진상을 조사해 규명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어서 7월14일 이대사 사인규명 수사가신속히 진행되도록 요구하는 진정서를 청와대에 보냈다. 이 진정서에서 '본인이 시체를 검안한 결과 타살혐의가 짙으니 철저히 처리되도록 편달해 달라'며 검찰에 수사의뢰서를 내게 된 이유를 썼다. 이후 검찰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누구에 의한 타살인지는 끝내 가려지지 않았다.

근 30년간 정확한 사실이밝혀지지 않다 보니 사건 당시 파리에거주했던 한인들은 지금도 이 문제를 놓고 수군거린다. 말이 잘 안되는 부분에는 상상력이 덧칠되기도 해서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당시 사건을 지켜본재불 한인 가운데 그가 자살했다고믿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한 한 교포(소르본 대학 박사)는 당시 파리에서 검시에 참여했던 의사의 동료로부터 들었다는 말을 이렇게 전했다. '그가 시신의 등에서 자상(刺傷)을7개 발견했다면서 "한국인은 자살을 하면서 칼을 등에 꽂고 죽는 재주가 있느냐?"라고 물었다.'이외에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일국의 대사가가정 문제로자살하면서 유서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는가 △자살도구로 부엌칼을선택했다는 것은 그의 신분에 비추어자연스럽지 않으며,약물 등 덜 고통스러운 자살방법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까 △새벽 6시에 일어나부엌에서 칼을 집어들고 현관으로 나와서 벽에칼을 대고 찔려 죽었다는 것도 어색하다 △최초 목격자로서 이 사건의 열쇠를 쥔 가정부 강옥순이 사건 직후 이수영의부인과 함께미국으로 떠났다가 석달 뒤에 한국으로 귀국한 것도 석연치 않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파리 경시청의 수사 기록과 법의학연구소의 검시 기록 그리고 사건 당시 공관 직원,특파원과 유가족의 증언을 수집해야 할 것이다. 

파리·김제완 통신원 

입력시간 : 2001-01-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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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31599&CMPT_CD=SEARCH

전 주불대사 이수영 자살사건 재조사해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의혹 파헤쳐 진상 밝혀야 한다


01.02.02 05:54l최종 업데이트 01.02.02 11:01l

김제완(oniva) 

 
99년 10월 프랑스 최후의 전범으로 알려진 모리스 파퐁이 유태인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로 인해 투옥됐다. 파퐁은 2차대전 중 보르도 지역에서 비시 정권의 고위 경찰관을 지내며 유태인 1500여명을 독일 등지의 수용소로 강제 추방한 혐의로 기소돼 98년 4월 1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마치고 목숨을 부지한 채 출감할 수 있을지 모를 89세의 노인이었지만 프랑스인들은 인정보다 정의를 우선했다.

 '리옹의 백정' '나치의 앞잡이'로 불린 클라우스 바르비에 대한 87년 재판도 프랑스인들의 뇌리에 선명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외적으로 공소시효를 두지 않는 '반인륜죄'라는 죄목을 만들어 법의 심판을 받도록 했다.

올해 1월 15일 한국에서는 개혁입법 차원에서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 통과됐다. 이 법에 따라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발생한 의문사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한 목적으로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10월 17일 현판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한 이 위원회는 69년 삼선개헌 이후 발생한 사건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고 30일 이내에 의문사의 가능성을 판단, 조사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비록 프랑스에서처럼 수사권은 없다 해도 공소시효가 지난 시기에 발생한 문제까지 다룬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반인륜법과 비교해 볼 만하다.

지난 72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한국대사의 자살사건은 그동안 재불한인사회에서 풍설로 떠다니며 의문과 의혹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이 사건은 이제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당시 사건을 지켜보았던 재불 한국인들의 생각이다. 특히 이 위원회법상 조사 신청 마감 시한이 12월말로 규정돼 있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르몽드, 자살 발표에 두 차례 의문 표해

28년전인 72년 4월 21일 오전 6시경, 프랑스주재 한국대사 이수영(李壽榮)은 빠리 몽테뉴가 7번지 대사관저에서 비명과 함께 쓰러진 채 발견됐다. 이수영이 신음하는 것을 발견한 부인이 경찰에 연락, 앰뷸런스로 병원에 옮기던 중 곧 숨을 거두었다. 한국대사관은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이라고 밝혔으나 곧 자살사건으로 수정해서 발표했다. 로이터통신은 프랑스 경찰도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린 것으로 4월 24일자에 전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공식 발표에 대해 르몽드지는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사건 발생 4일 후인 4월 25일자에서 르 몽드는 "설명되지 않은 한국대사의 자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몇 가지 취재 정보에 따라 사망 원인을 짚어나갔다.

르몽드는 우선 "자살의 원인을 사적인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며 전처 소생의 장녀와 부인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고심해 온 사실을 지적했다.

르몽드는 또 이대사가 "조만간 서울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며, "공보부 장관과 외무차관을 역임한 그는 한국 정부 내의 중요한 자리를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직무상의 문제로 인한 곤란한 처지가 자살에 이르게 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소식통을 인용해, 이대사가 "대사관의 정보기관과 협조관계에 어려운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르몽드는 또 같은 날짜 기사에서 이대사가 "특별히 우울해 보이진 않았다"는 사망 전 그를 만났던 동료들의 증언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대사는 "사망 전날까지도 많은 업무로 야근까지 했다"며 불과 수시간 후에 자살을 결행할 사람에게서 나타나기 마련인 증후가 보이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한국 외교관들은 "이대사가 신경우울증에 시달려 왔다"고 밝히고 있다고 보도했다.

르몽드가 위에서 지적한 가능성 중에 가정불화나 직무상의 어려운 문제가 원인이라면 자살이라는 결론에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보기관과의 갈등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중앙정보부에 의한 타살일 가능성이 있다.

4월 24일 기사 이후로 어찌된 일인지 이 신문에는 후속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르몽드에 이 사건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7년 후인 79년 8월 26일이다. 재불한국인 이유진 씨를 간첩으로 몰고간 계기가 된 소위 '한영길사건'을 보도하는 중에 72년 사건이 다시 언급된다.

르몽드는 이유진 씨가 KCIA의 희생물이 됐음을 암시하며 그 배경으로 중앙정보부의 활약상을 거론한다. 우선 67년 동백림 사건 당시 빠리에서 유학생들을 불법적으로 송환해간 일, 71년 동경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 그리고 72년의 이수영대사 자살 사건을 들었다.

르몽드가 두 차레나 이수영의 자살과 중앙정보부의 관련을 지적하는 동안에도 한국 언론에는 이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다.

이수영, 박정희와 갈등 밝혀져

 그의 사망이 르몽드에서 의혹을 제기한 대로 중앙정보부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당시 공식발표처럼 가정불화를 비관한 자살인지는 현재로서는 명확하게 가려내기 어렵다.

다만 이 사건이 일어났던 그 시기의 정황을 되짚어 보면 진실의 단초나마 얻을 수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72년은 격동의 해였다. 6월 3일 사채동결조치, 7월 4일 7.4공동성명, 10월 17일 시월 유신 등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특히 시월유신으로 인해 국내의 정정이 불안해져 해외에서 활동하는 외교관들도 동요한다. 이 당시 미국주재 한국대사관 공보관장인 이재현 공사가 미국으로 정치망명한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수영은 53년 판문점 휴전회담 한국측 대표로 활동하다 육군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러나 43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이후 해방정국에 입대한 경력을 가지고 있어 당시의 군출신과는 색깔을 달리했던 사람이다. 이동원 전 외무장관의 회고록 '오프 더 레코드'에는 박정희와 이수영 사이의 갈등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소개돼 있다.

 "(......) 결국 프랑스 대사에는 베테랑 이수영 씨가 임명됐지만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박대통령은 '이수영'이란 말을 듣는 순간 "그 친구는 무조건 안 돼!"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연인즉, 이대사가 64년 5월부터 잠시 공보부장관으로 일할 때 발생한 언론파동 때문이었다.

당시 공화당이 신문윤리위원회 권한을 확대해 언론을 규제하려 하자 전언론이 일어나 반대를 했는데 이 때 이대사가 언론편에 기울어 박대통령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앙일보 10/4/99)

르피가로는 72년 4월 24일자에서는 이수영이 정일권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박정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부임할 수 있었던 것은 정일권의 지원에 힘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북 철산 출신의 이수영은 당시 도산 안창호로부터 정신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67년 동백림사건 당시 프랑스 유학생들의 강제 압송과정을 지켜보며 괴로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같은 배경을 짐작해 보면 그의 죽음이 단순한 가정불화에 의한 자살이 아닐 수 있다는 추론에 이르게 한다.

이수영의 아버지 이익항도 아들의 죽음에 의문을 갖고 72년 7월 3일 서울지검에 수사의뢰서를 제출했다. 이 의뢰서에서 "아들 이수영은 지난 4월 21일 주불공관 재직시 사망하여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판교리 가족묘지에 매장했으나 그 사인이 가정불화로 인한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믿어지지 않고 풍설에 의하면 타살혐의가 있다고 하니 당국에서 진상을 조사 규명해 달라"고 호소했다. (서울신문 7/3/72)

이 수사의뢰서를 받은 검찰측은 "모든 것은 법대로 하겠다"고 밝혔으나 현직대사가 임지에서 사망한 데 대한 사인규명을 할 경우 국가적인 체면문제 등 여러 문제점들로 인해 적극적인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불만을 갖게 된 이익항은 7월 14일 "이대사의 사인규명 수사가 올바로 신속하게 처리되도록 편달해 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청와대에 보냈다. 이씨는 "수사가 착수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렇다 할 진전이 없어 궁금하다"며 "본인이 시체를 검안해 본 결과 타살혐의가 짙으니 철저히 처리되도록 편달해달라"는 내용과 검찰에 수사의뢰서를 내게 된 이유를 썼다. (중앙일보 7/15/72)

이익환은 의사출신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가 담당 검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직원들과 함께 검안한 후에 얻은 결과는 소홀히 넘길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앞서 검찰은 7월 4일 이익환을 소환, 수사의뢰서를 뒤늦게 내게 된 경위를 물었으며 이씨는 "자살이 아니라면 며느리에게 용의점이 있다"고 진술했음을 밝혔다. (서울신문 7/5/72)

누구에 의한 타살인지는 가려지지 않았지만 부친이 이수영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고 믿은 것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재불교포들도 자살 발표 믿지 않아

 근 30년간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다 보니 사건 당시 빠리에서 거주했던 재불한인들 사이에는 지금도 이 문제로 수군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말이 잘 이어지지 않는 부분에는 상상력이 동원되기도 해서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당시 사건을 지켜본 재불 한인들 중에 자살이라고 믿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한 한 재불교포(소르본느대 박사)는 당시 빠리에서 검시에 참여했던 의사의 동료로부터 들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로는 시신의 등 쪽에 7개의 자상(刺傷)이 발견됐다"며 "한국인은 자살을 하면서 칼을 등어리에 꽂고 죽는 재주가 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초대 재불한인회장을 역임했던 한묵(재불화가) 씨는 이대사와 임기를 함께 했으므로 당시의 사정을 증언할 위치에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다. 한씨는 "이 사건 직후 한국인 한 사람이 대사관에서 마련해 준 여권을 소지하고 급히 미국으로 떠났다"며, "당시 그는 신혼으로 2개월된 갓난 아이가 있었으나 신부에게 연락조차 하지 못하고 떠났다"고 말했다. 이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겠느냐"고 말해 그가 범인일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프랑스 교포들 사이에는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그의 이름까지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이외에도 이수영의 자살 발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당초에 대사관은 이대사가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이라고 발표했다가 칼로 자살한 것이라고 번복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국의 대사가 가정문제로 자살했다고 하더라도 유서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는가. 또한 자살의 방법으로 부엌칼을 사용했다는 것도 그의 신분에 비춰보면 자연스럽지 않다. 약물 등을 이용한 보다 덜 고통스러운 자살방법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새벽 6시에 일어나 부엌에서 칼을 집어들고 현관으로 나와서 벽에 칼을 대고 찔려서 죽었다는 것도 어색해 보인다.

최초 목격자로서 이 사건의 진상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가정부 강옥순은 이수영의 부인과 함께 사건 직후 미국으로 떠났다가 석달 후에 한국으로 귀국했던 것도 석연치가 않다.

이같은 추론들이 떠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재조사해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 의식있는 재불한인들의 의견이다.

이 위원회에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빠리 경시청의 수사기록과 법의학연구소의 검시기록 그리고 사건 당시 공관직원, 특파원들 그리고 유가족의 증언들을 수집해 진상을 밝혀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와 관련된 자료들은 다음의 사이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perso.cybercable.fr/oni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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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6590&CMPT_CD=SEARCH

'전프랑스대사 의문사' 기각 재고해야

진정인이 진상규명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


01.10.20 18:13l최종 업데이트 01.10.22 09:38l

김제완(oniva)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양승규 위원장님께

 올해 초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접수한 83건의 사건 중에 유일하게 해외에서 발생한 사건의 진정인입니다. 지난 93년부터 빠리에서 동포신문 '오니바'를 펴내온 저는 지난해 연말경, 72년 4월 프랑스주재 한국대사가 의문사한 사건에 대해 취재해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능력으로는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위원회에서 조사를 해달라고 진정했었지요.

이 문제에 대해 지난 9월 1일에 발표한 귀 위원회의 판단 결과는 기각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기각 결정문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합니다. 이 지적들이 합당하면 기각결정을 재고해주기를 바랍니다. 재고 또는 재심사가 불가능하다면 적절한 해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에펠탑과 세느강의 도시, 낭만과 자유의 도시로 알려진 파리는 한국의 현대사와 관련된 여러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난 도시이기도 합니다. 67년의 이응노 화백을 비롯한 유학생 납치사건과 79년의 김형욱 실종사건 그리고 같은 해 발생한 재불교포 이유진 간첩조작사건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모두 다 중앙정보부가 관련된 사건들입니다. 이같은 일이 일어났던 빠리에서 유신 직전인 72년에 발생한 프랑스주재 한국대사 이수영의 의문의 죽음은 정치적인 배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담당 조사관들은 이같은 역사적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까지 충분히 이해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진정인인 제가 보기에 조사 결과는 크게 미흡한 것이었습니다만, 미비한 법으로 인해 제한된 조사기간에 쫒기는 조사관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는 점도 인정이 됩니다. 또한 가족이 나서서 조사관들을 독려, 재촉하지 못했고 진정인조차 한국에 있지 않아 사실상 이 사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는 점도 이처럼 불충분한 조사결과가 나오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재대로 조사를 하지 못했다면 최소한 미제사건으로 남겨 놓았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언젠가 증거가 나타나면 다시 조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사건의 기각결정은 귀 위원회가 담당한 83건 중 가장 먼저 나온 판단들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이처럼 성급하게 기각 결정을 내린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진정인은 이같은 결과가 나온 것은 무엇보다 관련법규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반인륜적인 범죄사건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두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법개정을 통해 공소시효를 없애고 시간을 충분히 갖고 역사앞에 진실을 밝힌다는 자세로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위원장님도 동의하실 것으로 믿고 말씀을 더 드리지 않겠습니다.

사건해결의 열쇠인 유가족도 프랑스 공식기록도 못찾아

 이수영 사건은 의문사위원회에서 담당하고 있는 사건 중에서 드물게도 진정인이 가족이 아닌 제3자인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위원회의 조사활동의 대상으로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은 이수영의 자녀 등 유가족들의 진술을 받는 일입니다. 직계 가족이야말로 사건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아울러 한국의 공권력에 의한 타살 가능성이 있다면 당시 박정희정권 치하의 다른 국가기관의 조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 경찰당국의 조서를 확보하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가 의혹의 문을 열고 진실에 이르기 위한 열쇠입니다.

그러나 7개월 동안의 조사기간 동안 의문사위는 미망인과 두 아들 딸등 네 명의 직계가족과 이수영의 형의 자녀 등 방계가족들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위원회 조사관들은 이수영의 딸 이마리가 LA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지난 6월 그를 만나러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집을 비워서 만나지 못했다는군요. 특기할 점은 조사단이 미국 LA를 방문하기 직전 이마리가 청와대에 진정서를 내어서 조사를 받지 않도록 해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증언들에 의하면 이마리는 사건 당시 이수영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종의 추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며 그분의 명예에도 관련된 일이어서 상술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마리는 이 문제로 인해 치유하기 어려운 심적 고통을 겪어왔을 것입니다. 조사관들의 조사를 회피하기 위해 진정서를 제출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조사관들은 진정한 사유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담당 조사관은 이마리 외에 다른 가족들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 컴퓨터에 입력돼 있지 않으므로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될 뿐 찾을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수십년 전의 사건현장을 찾아서 발로 뛰어온 다른 조사관들과 비교되는 태도입니다. 이마리 외에도 이수영의 미망인과 아들이 둘 있습니다. 이마리보다는 그의 오빠인 이영일이 객관적인 진술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이수영의 형이 서울에 거주했으므로 인척들이 한국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가족과 인척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의혹의 문을 여는 또 하나의 열쇠인 프랑스 정부의 관련 서류도 입수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6월 18일부터 5일 동안 담당 조사관 세 명이 빠리에 출장조사차 나왔으나 교포들의 증언을 청취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 뿐 프랑스 관계기관의 자료는 입수하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경찰의 당시 수사자료 요구에 대한 프랑스 외교부의 공식적인 답변은 지난 4월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에 전해졌습니다. 10년간의 보존기간이 지나 서류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외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의 성격으로 보아 이수영 사건 수사는 경찰보다 상급 기관인 프랑스 정보기관에서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조사관들은 빠리에서 이 기관과 접촉 시도조차도 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발견된 것은 한국 검찰자료에 첨부돼 있는, 프랑스 의사가 작성한, 자살로 보인다는 내용을 담은 검안기록뿐입니다. 한국 검찰의 수사기록도 보존기한이 지나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처럼 두 가지 열쇠중 어느 하나도 손에 쥐지 못한 채 왜 그리 급하게 기각 결정을 했을까요? 그리고는 본질과 관련이 적은 문제들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기각 결정문의 오류와 왜곡

 위원회의 기각 결정문은 진정인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며 세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1) 진정인은 프랑스 교포신문인 오니바신문 발행인으로 사망 당시 프랑스에 없었고, 회고록·현지 신문·교포들 사이의 떠돌던 소문 등을 확인 절차 없이 막연히 추측만 가지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에 부합되는 증거가 전무하다.
 (2) 진정인은 이수영의 등 부분에 자상이 7군데나 있었다는 풍문에 따라 타살을 주장하나, 위에서 인정한 바와 같이 사체검안서, 사체 해부감정서에 의하면 등 부분이 아니라 흉부에 세 군데의 자상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3) 이수영의 부친 이익항에게 범인 도피 가능성을 제보했다는 한묵은 자신이 과거 대사관 광복절 기념행사장에서 진정인이 묻기에 이익항이 수사의뢰를 하였다는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오니바신문 기사 내용과 같이 대사관에서 발행해 준 여권을 가지고 미국으로 간 사람이 이수영을 죽였다고 말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같은 이유들은 진정인으로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조사관들은 가족의 진술과 프랑스정부 관련서류 등을 통해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려 하지 않고, 진정인이 제기한 의혹들을 쫒아간 뒤 그것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마치 저 산을 보라고 가리켰더니 산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는 꼴입니다.

위원장님 생각해보십시오. 진정인이 제기한 의혹이 사실로 인정될 수 없다면 이수영은 공권력에 의해 타살됐다는 혐의가 없어지는 것입니까? 위 이유 중 두 번째인 경우를 보십시오. 등이 아니라 가슴에 자상이 발견됐다는 것은 그 동안 조사결과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진정인이 취재한 교포의 증언이 잘못된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공권력에 의한 타살이 아니라는 이유로 꼽을 수 있는 것입니까. 결정문의 기각 이유는 아주 기초적인 논리상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로 결정한 이상 위원회에서 자발적으로 증거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조사관들이 그러한 노력을 충분히 했는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사례를 보면 진정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진정인은 그 동안 단 한차례도 그의 죽음이 공권력에 의한 타살이라고 주장한 바가 없습니다. 다른 사건들과 달리 제3자인 진정인은 그렇게 주장할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의혹을 제기했고 다시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었죠. 그런데 이같은 의혹제기를 "주장"이라고 하며 길지 않은 결정문에서 세 차례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장"을 반박했으니 진정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이수영도 공권력에 의한 타살로 볼 수 없다는 식입니다. 이거 말이 안됩니다.

그런데 결정문의 기각 사유는 진정인이 제기한 의혹을 정면으로 논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의혹을 갖게 된 결정적인 근거라고 밝혔던 르몽드지의 두 차례에 걸친 보도 내용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 부분에서 조사관들의 자의적인 조사 태도가 잘 나타납니다. 프랑스에서 뿐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공신력을 인정받는 르몽드를 "현지신문"이라고 표현하고 교포사회에서 떠도는 소문과 나란히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진정인의 "막연한 추측"의 근거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결정문의 다른 부분에 르몽드가 한차레 직접 언급돼 있습니다. "대사관 식모였던 강옥순 및 현장에 갔던 르몽드 기자 등은, (...) 현장에 (...)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다고 말한 대목입니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기자는 르몽드가 아니라 르피가로 기자인 것임은 여러 증언에 의해 확인된 사실입니다.

앞에서는 이수영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르몽드를 "현지신문"이라고 기록한 반면, 당시 이 사건을 단순자살이라고 보도했던 우파지 르피가로신문의 기자를 르몽드 기자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조사관들의 실수로만 보기에는 너무나 공교롭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조사관들이 이수영의 죽음에 대한 예단을 갖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진정인이 의혹을 갖게 된 동기는 르몽드 기사

 진정인이 이수영 전대사의 자살에 의혹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벌써 4년여 전입니다. 그러나 교포들 사이에 떠도는 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뒤 2000년 1월, 재불교포 이유진 씨의 간첩조작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던 중 이 사건을 보도했던 르몽드 신문 79년 8월 26일자 기사를 접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이 기사는 당시 중앙정보부의 대표적인 활동 세 가지를 거론했는데 김대중 납치사건, 동백림사건, 그리고 이수영 대사의 죽음이 그것입니다.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부엌칼에 찔려 죽임을 당한 대사의 자살"이라는 모순어법의 표현을 사용한 것이 특이했습니다. 아마 프랑스 경찰이 이미 공식적으로 자살로 발표한 사건이기 때문인 듯했습니다.

이 기사에 충격을 받은 저와 동료들은 사건 당시의 르몽드 기사를 찾았습니다. 사건 발생 나흘만인 72년 4월 25일자에 실린 르몽드 기사는 "한국대사의 자살, 의혹으로 남아"라는 제목으로 몇 가지 사망원인을 거론했고 그중에 하나로 대사관내 정보기관과의 갈등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이같은 일은 국가기관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사안이라고 보고 귀 위원회에 진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진정서에도 이 사실을 적시했으며 르몽드의 기사들을 주요 팩트로 사용해 작성한 기사(오니바신문 2000년 12월 1일)도 함께 제출했습니다. 그 이후 시사저널 2001년 1월 11일자와 오마이뉴스 2월 2일자에 제가 기고한 관련 기사도 르몽드 기사가 주요근거였습니다.

관련기사-전 주불대사 이수영 자살사건 재조사해야

 그러나 기각 결정문에는 르몽드의 지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도 단순한 수사상의 실수로 보아야 할까요.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빠져 버린 것을 그렇게 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공권력에 의한 타살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이에 따른 불필요한 논란을 일어날까 두려워서 르몽드의 보도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위원장님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 신문에서 왜 그같은 보도를 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관들의 빠리 출장기간중에 조사대상에 놓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조사관들의 주요활동은 당시 빠리에 있었던 교포들을 만나 이 사건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되새겨내 진술을 받은 것뿐입니다.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들로부터 29년전 사건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내서 얻은 진술이 어떤 증거능력을 갖겠습니까. 오히려 조사에 혼선만 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기각 이유로 거론된 재불교포 한묵의 진술 관련사항이 그렇습니다. 지난 4월 진정인이 위원회에 출두해 조사를 받으면서 그가 자기의 말을 번복하고 있어 증거로 삼기가 어렵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위에서 보듯 한묵이 자신의 말을 번복하고 있는 것을 들며 진정인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군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같이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는 위원회의 결정문은 대통령소속기관의 결정문으로서의 품격이나 유효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봅니다. 나아가 이처럼 문제투성이의 결정문이 어떻게 작성될 수 있었는지 그것 자체가 또하나의 의혹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가정불화로 인한 부부싸움 끝에 자살을 했다 하더라도 일국의 대사가 부엌칼을 벽에 대고 스스로 몸을 부딪쳐 가슴을 세 차례 찔려 사망했다는 것은 여전히 어색해 보이고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자살을 할 때 스스로 세 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칼로 가슴을 찌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법의학자들 사이의 상치된 견해들도 언급돼 있지 않았습니다. 위원장님, 이 결정문은 귀 위원회의 명예와 권위에 누가 될 만큼 흠이 많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기각 결정을 재고해주시기를 바랍니다.

2001년 10월17일
 프랑스 빠리에서 진정인 김제완 드림

 의문사위, 이수영사건 각하 결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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