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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주불대사 이수영 자살사건 재조사해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의혹 파헤쳐 진상 밝혀야 한다


01.02.02 05:54l최종 업데이트 01.02.02 11:01l

김제완(oniva) 

 
99년 10월 프랑스 최후의 전범으로 알려진 모리스 파퐁이 유태인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로 인해 투옥됐다. 파퐁은 2차대전 중 보르도 지역에서 비시 정권의 고위 경찰관을 지내며 유태인 1500여명을 독일 등지의 수용소로 강제 추방한 혐의로 기소돼 98년 4월 1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마치고 목숨을 부지한 채 출감할 수 있을지 모를 89세의 노인이었지만 프랑스인들은 인정보다 정의를 우선했다.

 '리옹의 백정' '나치의 앞잡이'로 불린 클라우스 바르비에 대한 87년 재판도 프랑스인들의 뇌리에 선명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외적으로 공소시효를 두지 않는 '반인륜죄'라는 죄목을 만들어 법의 심판을 받도록 했다.

올해 1월 15일 한국에서는 개혁입법 차원에서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 통과됐다. 이 법에 따라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발생한 의문사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한 목적으로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10월 17일 현판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한 이 위원회는 69년 삼선개헌 이후 발생한 사건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고 30일 이내에 의문사의 가능성을 판단, 조사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비록 프랑스에서처럼 수사권은 없다 해도 공소시효가 지난 시기에 발생한 문제까지 다룬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반인륜법과 비교해 볼 만하다.

지난 72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한국대사의 자살사건은 그동안 재불한인사회에서 풍설로 떠다니며 의문과 의혹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이 사건은 이제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당시 사건을 지켜보았던 재불 한국인들의 생각이다. 특히 이 위원회법상 조사 신청 마감 시한이 12월말로 규정돼 있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르몽드, 자살 발표에 두 차례 의문 표해

28년전인 72년 4월 21일 오전 6시경, 프랑스주재 한국대사 이수영(李壽榮)은 빠리 몽테뉴가 7번지 대사관저에서 비명과 함께 쓰러진 채 발견됐다. 이수영이 신음하는 것을 발견한 부인이 경찰에 연락, 앰뷸런스로 병원에 옮기던 중 곧 숨을 거두었다. 한국대사관은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이라고 밝혔으나 곧 자살사건으로 수정해서 발표했다. 로이터통신은 프랑스 경찰도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린 것으로 4월 24일자에 전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공식 발표에 대해 르몽드지는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사건 발생 4일 후인 4월 25일자에서 르 몽드는 "설명되지 않은 한국대사의 자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몇 가지 취재 정보에 따라 사망 원인을 짚어나갔다.

르몽드는 우선 "자살의 원인을 사적인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며 전처 소생의 장녀와 부인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고심해 온 사실을 지적했다.

르몽드는 또 이대사가 "조만간 서울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며, "공보부 장관과 외무차관을 역임한 그는 한국 정부 내의 중요한 자리를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직무상의 문제로 인한 곤란한 처지가 자살에 이르게 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소식통을 인용해, 이대사가 "대사관의 정보기관과 협조관계에 어려운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르몽드는 또 같은 날짜 기사에서 이대사가 "특별히 우울해 보이진 않았다"는 사망 전 그를 만났던 동료들의 증언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대사는 "사망 전날까지도 많은 업무로 야근까지 했다"며 불과 수시간 후에 자살을 결행할 사람에게서 나타나기 마련인 증후가 보이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한국 외교관들은 "이대사가 신경우울증에 시달려 왔다"고 밝히고 있다고 보도했다.

르몽드가 위에서 지적한 가능성 중에 가정불화나 직무상의 어려운 문제가 원인이라면 자살이라는 결론에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보기관과의 갈등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중앙정보부에 의한 타살일 가능성이 있다.

4월 24일 기사 이후로 어찌된 일인지 이 신문에는 후속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르몽드에 이 사건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7년 후인 79년 8월 26일이다. 재불한국인 이유진 씨를 간첩으로 몰고간 계기가 된 소위 '한영길사건'을 보도하는 중에 72년 사건이 다시 언급된다.

르몽드는 이유진 씨가 KCIA의 희생물이 됐음을 암시하며 그 배경으로 중앙정보부의 활약상을 거론한다. 우선 67년 동백림 사건 당시 빠리에서 유학생들을 불법적으로 송환해간 일, 71년 동경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 그리고 72년의 이수영대사 자살 사건을 들었다.

르몽드가 두 차레나 이수영의 자살과 중앙정보부의 관련을 지적하는 동안에도 한국 언론에는 이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다.

이수영, 박정희와 갈등 밝혀져

 그의 사망이 르몽드에서 의혹을 제기한 대로 중앙정보부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당시 공식발표처럼 가정불화를 비관한 자살인지는 현재로서는 명확하게 가려내기 어렵다.

다만 이 사건이 일어났던 그 시기의 정황을 되짚어 보면 진실의 단초나마 얻을 수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72년은 격동의 해였다. 6월 3일 사채동결조치, 7월 4일 7.4공동성명, 10월 17일 시월 유신 등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특히 시월유신으로 인해 국내의 정정이 불안해져 해외에서 활동하는 외교관들도 동요한다. 이 당시 미국주재 한국대사관 공보관장인 이재현 공사가 미국으로 정치망명한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수영은 53년 판문점 휴전회담 한국측 대표로 활동하다 육군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러나 43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이후 해방정국에 입대한 경력을 가지고 있어 당시의 군출신과는 색깔을 달리했던 사람이다. 이동원 전 외무장관의 회고록 '오프 더 레코드'에는 박정희와 이수영 사이의 갈등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소개돼 있다.

 "(......) 결국 프랑스 대사에는 베테랑 이수영 씨가 임명됐지만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박대통령은 '이수영'이란 말을 듣는 순간 "그 친구는 무조건 안 돼!"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연인즉, 이대사가 64년 5월부터 잠시 공보부장관으로 일할 때 발생한 언론파동 때문이었다.

당시 공화당이 신문윤리위원회 권한을 확대해 언론을 규제하려 하자 전언론이 일어나 반대를 했는데 이 때 이대사가 언론편에 기울어 박대통령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앙일보 10/4/99)

르피가로는 72년 4월 24일자에서는 이수영이 정일권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박정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부임할 수 있었던 것은 정일권의 지원에 힘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북 철산 출신의 이수영은 당시 도산 안창호로부터 정신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67년 동백림사건 당시 프랑스 유학생들의 강제 압송과정을 지켜보며 괴로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같은 배경을 짐작해 보면 그의 죽음이 단순한 가정불화에 의한 자살이 아닐 수 있다는 추론에 이르게 한다.

이수영의 아버지 이익항도 아들의 죽음에 의문을 갖고 72년 7월 3일 서울지검에 수사의뢰서를 제출했다. 이 의뢰서에서 "아들 이수영은 지난 4월 21일 주불공관 재직시 사망하여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판교리 가족묘지에 매장했으나 그 사인이 가정불화로 인한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믿어지지 않고 풍설에 의하면 타살혐의가 있다고 하니 당국에서 진상을 조사 규명해 달라"고 호소했다. (서울신문 7/3/72)

이 수사의뢰서를 받은 검찰측은 "모든 것은 법대로 하겠다"고 밝혔으나 현직대사가 임지에서 사망한 데 대한 사인규명을 할 경우 국가적인 체면문제 등 여러 문제점들로 인해 적극적인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불만을 갖게 된 이익항은 7월 14일 "이대사의 사인규명 수사가 올바로 신속하게 처리되도록 편달해 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청와대에 보냈다. 이씨는 "수사가 착수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렇다 할 진전이 없어 궁금하다"며 "본인이 시체를 검안해 본 결과 타살혐의가 짙으니 철저히 처리되도록 편달해달라"는 내용과 검찰에 수사의뢰서를 내게 된 이유를 썼다. (중앙일보 7/15/72)

이익환은 의사출신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가 담당 검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직원들과 함께 검안한 후에 얻은 결과는 소홀히 넘길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앞서 검찰은 7월 4일 이익환을 소환, 수사의뢰서를 뒤늦게 내게 된 경위를 물었으며 이씨는 "자살이 아니라면 며느리에게 용의점이 있다"고 진술했음을 밝혔다. (서울신문 7/5/72)

누구에 의한 타살인지는 가려지지 않았지만 부친이 이수영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고 믿은 것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재불교포들도 자살 발표 믿지 않아

 근 30년간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다 보니 사건 당시 빠리에서 거주했던 재불한인들 사이에는 지금도 이 문제로 수군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말이 잘 이어지지 않는 부분에는 상상력이 동원되기도 해서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당시 사건을 지켜본 재불 한인들 중에 자살이라고 믿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한 한 재불교포(소르본느대 박사)는 당시 빠리에서 검시에 참여했던 의사의 동료로부터 들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로는 시신의 등 쪽에 7개의 자상(刺傷)이 발견됐다"며 "한국인은 자살을 하면서 칼을 등어리에 꽂고 죽는 재주가 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초대 재불한인회장을 역임했던 한묵(재불화가) 씨는 이대사와 임기를 함께 했으므로 당시의 사정을 증언할 위치에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다. 한씨는 "이 사건 직후 한국인 한 사람이 대사관에서 마련해 준 여권을 소지하고 급히 미국으로 떠났다"며, "당시 그는 신혼으로 2개월된 갓난 아이가 있었으나 신부에게 연락조차 하지 못하고 떠났다"고 말했다. 이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겠느냐"고 말해 그가 범인일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프랑스 교포들 사이에는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그의 이름까지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이외에도 이수영의 자살 발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당초에 대사관은 이대사가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이라고 발표했다가 칼로 자살한 것이라고 번복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국의 대사가 가정문제로 자살했다고 하더라도 유서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는가. 또한 자살의 방법으로 부엌칼을 사용했다는 것도 그의 신분에 비춰보면 자연스럽지 않다. 약물 등을 이용한 보다 덜 고통스러운 자살방법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새벽 6시에 일어나 부엌에서 칼을 집어들고 현관으로 나와서 벽에 칼을 대고 찔려서 죽었다는 것도 어색해 보인다.

최초 목격자로서 이 사건의 진상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가정부 강옥순은 이수영의 부인과 함께 사건 직후 미국으로 떠났다가 석달 후에 한국으로 귀국했던 것도 석연치가 않다.

이같은 추론들이 떠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재조사해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 의식있는 재불한인들의 의견이다.

이 위원회에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빠리 경시청의 수사기록과 법의학연구소의 검시기록 그리고 사건 당시 공관직원, 특파원들 그리고 유가족의 증언들을 수집해 진상을 밝혀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와 관련된 자료들은 다음의 사이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perso.cybercable.fr/oni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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