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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완의좌우간에

"이런 괴물이 진보?" vs "진보의 배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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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괴물이 진보?" vs "진보의 배신자!" 

[김제완의 '좌우간에']<12> 리버럴과 레프트의 진보 쟁탈 전쟁

김제완 세계로신문 대표   2012.09.05 13:25:00 

 
지난 여름 통합진보당 당원들은 사이트의 당원게시판에서 혁신파와 구당권파로 나뉘어 뜨거운 공방전을 펼쳤다. 아메리카노 커피 논쟁과 펀드 빚 논쟁 등 뜨거운 이슈도 튀어나왔으며 당원들은 이런 주제를 따라가며 설전을 벌였다. 분당이 초읽기에 들어간 지금은 거친 말들의 위험 수위가 더 높아졌다. 서로가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으로 작정하고 있어 막가는 말들이 오고간다. 당원들이 쏟아낸 말 폭탄 중에 이런 말들이 보인다.

"세상에, 이런 괴물들을 진보주의자라고 믿었다니! (...) 헛소리 집어치우고, 어디 가서 다시는 진보라고 지껄이지 마라."

"진보를 배신하는 유시민 심상정 강기갑의 거짓의 길에 동참하지 마시라."

앞의 것은 민주주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며 구당권파를 공격하는 국참계 당원의 글이고, 뒤의 것은 혁신파의 선동에 현혹돼 탈당하지 말라는 민노계 당원의 호소다. 이외에도 "진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라며 힐난하거나 "너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라고 공격하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저잣거리에서 서로 삿대질하며 싸우는 형국이다. 여기서 유심히 들여다보면 진보라는 낱말이 전단을 제공하거나 싸움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합진보당에서 진보는 명시적인 최고의 가치이다. 당원들은 막연히 올바르고 바람직한 어떤 것이며 현실을 극복하는 힘이고 미래의 비전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지금 같은 당내 투쟁 상황에서는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목표물이다. 진보라는 말을 더 많이 차지하면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진보 쟁탈 전쟁이다.

싸움의 본질은 계파간의 권력투쟁이어서 어느 쪽의 주장이 더 민주주의 원칙에 맞고 더 합리적인가를 따지기 어렵다. 양쪽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만큼이나 그 간격이 크다. 각각 명분과 논리를 갖고 있어서 양쪽이 수용할 수 있는 결론을 얻기도 어렵다. 그래서 경기자들은 상대방 선수가 진보가 아니라는 근거를 찾는데 혈안이 된다. 일반국민에게는 복잡한 논리가 필요 없다. "저 사람들은 진보가 아니다" 라는 손가락질이 먹히면 이긴다. 이기는 편이 진보라는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있다.

축구 시합에 비유하면 경기의 공이 바로 진보라는 언어이다. 축구 경기에서는 볼 점유율을 높여야 주도권을 잡을 수 있고 골문에 더 많은 골을 넣을 수 있다. 지금의 정치게임에서는 진보라는 공을 서로 차지하려고 한다. 진보 점유율을 높여야 정치적 이익이라는 득점을 많이 얻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혁신파가 압도적으로 승점을 많이 얻었으며 구당권파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재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구당권파 특유의 버티는 힘이 있어 사태의 추이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김규항 진중권 논쟁은 두 번째 봉숭아 학당

리버럴과 레프트가 서로 자기가 진보라고 우기는 싸움은 진보통합당 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난해 3월에 있었던 유시민과 노회찬의 봉숭아학당 놀이에서처럼 계파의 수장급들이 시범을 보여주었다.

같은 시기에 있었던 김규항 진중권 논쟁도 똑같은 성격을 띤다. 조국 교수와 오연호 대표의 저서 '진보집권플랜'의 제목에 시비가 걸렸다. 저자들이 말한 정권교체의 주체는 민노당이 아니라 민주당이므로 즉 진보세력이 아니라 시민세력이므로 "시민집권플랜"이라고 해야 맞다는 문제제기였다.

좌파 논객 김규항이 제기한 이 주장에 대해서 진중권 교수는 진보가 그의 허락을 받고 사용해야 하는 상표 같은 것이냐고 공격했다. 진보가 서로 자기 것이라며 할퀴며 싸우는 양상이다. 진보라는 단어에 숨은 비밀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농락당하고 있으니 당대 최고수의 논객들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노회찬 유시민이 연출한 봉숭아학당 놀이의 두 번째 버전이다.

이 논쟁들은 모두 노선상의 쟁투가 아니라 진보라는 용어를 선점하기 위해 다툰다. 진보를 차지하게 되면 게임에서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국어연구원이 심판자로 나서서 조정을 해주어야 하는 문제일까.

리버럴을 진보로 번역하는 출판계 관행

자유주의가 진보주의로 인식되고 통용되는 것은 편견에 사로잡힌 몇 사람들의 취향 때문이 아니다. 한국의 출판계에는 리버럴리즘을 진보주의로 번역하는 특별한 관행이 있다. 그것도 유럽의 원서는 자유주의로 번역하는데 미국에서 온 책들만 진보주의로 번역한다. 왜 이런 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런 번역 관행은 진보를 둘러싼 혼란들을 재생산하는 엔진역할을 하고 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진보주의 연구에 집중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 문제를 포착했다. "진보주의와 자유주의가 자꾸 혼동이 되고 미국에서는 영어로 '자유주의(liberalism)'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걸 '진보주의'로 번역한 것도 있는데 진짜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이 관계들을 잘 한번 정리해 봤으면 좋겠고요." (진보의 미래 122쪽)

자유주의를 진보주의로 번역했다고 노무현이 언급한 책은 그가 애독했던 폴 크루그먼의 저서 "미래를 말하다"이다. 이 책의 역자들은 옮긴이의 글에서 이례적으로 "고의적 오역"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기술적으로 몇 가지 고민에 빠졌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liberalism에 대한 해석이다. 이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자유주의'다. '진보적'이라는 의미로 progressive라는 단어가 있지만 책의 전체 구도속에서 본다면 보수주의를 뜻하는 conservatism의 상대 개념으로 liberalism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를 '진보주의'로 해석했다."

이 책의 번역자들은 용기있게 고민을 털어놨지만 대부분의 미국 책 번역자들은 고민이나 양해도 없이 타성적으로 리버럴리즘을 진보주의로 번역한다. 이 문제를 번역자의 개인적인 판단에 맡겨두어야 일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한국 사회과학계의 인식적 착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번역자가 리버럴리즘을 진보주의로 번역했다면 정작 프로그레스는 무엇으로 번역했을까 궁금해진다. 그것을 똑같이 진보로 번역했을까.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어떻게 구별해 주었는지를 밝혀야 하지만 그런 언급은 찾을 수 없다. 이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다른 일화가 있다.

지난해 재출간된 조지 레이코프의 "도덕, 정치를 말하다"라는 책에는 진보라는 말이 셀 수 없이 여러 번 나타난다. 리버럴을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프로그레스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번역자 손대오 씨에게 직접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손 씨는 이 단어는 이 두꺼운 책에서 두세 번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묵살해도 될 정도였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프로그레스는 사회과학계에서 쓰이지 않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김진석의 부풀려진 진보와 좁혀진 진보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이 진보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데도 이 문제를 지적하는 연구자들을 찾기 어렵다. 그런 중에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나섰다. 그는 지난해 출간된 저서 "우충좌돌 중도의 재발견"에 실린 '부풀려진 진보와 좁혀진 진보'에서 진보 개념의 모호성과 자의성을 지적했다. 그는 몇 해 전부터 우충좌돌을 통해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 양쪽을 모두 치받고 중도의 길을 넓혀가겠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진보 쪽을 치받다가 우리사회의 진보 규정에 자의성이 있음을 포착한다.

그가 포착한 내용의 골자는 이렇다. 한국의 진보에는 좌파와 리버럴이 포함돼 있는데 필요에 따라 두 가지를 모두 진보라고 말하기도 하고 좌파만을 진보라고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진보의 범위를 부풀리기도 하고 좁히기도 한다는 것이다. 진보의 혼돈에 대한 연구를 찾아보기 어려운 지식계에서 이 같은 언급은 반갑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 같은 혼란을 지적한 김진석 자신은 진보를 좌파로 보는 관점에 즉 좁혀진 진보의 관점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는 신문 칼럼 "'진보'이념 뒤에 숨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최근 '진보가 집권해야 한다'는 구호를 내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모든 구호에서, '진보'라는 말은 극심한 오해와 왜곡을 조장하고 있다. '진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진보라기보다는 중도좌파 혹은 '리버럴(liberal)'에 가깝다. 그런데 그들은 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고 '진보'라 자칭할까? 일종의 '진보 인플레이션'이다".(한국일보 2011년 2월21일)

김진석은 리버럴이 왜 진보를 참칭하느냐고 비판한다. 왜 자신을 솔직하게 자유주의자라고 하지 않고 진보라는 아름다운 말을 위선적으로 탐하느냐 이런 뜻이다. 김규항 진중권 논쟁에서의 김규항의 입장이다. 진보의 규정을 레프트로 좁히면 리버럴은 진보가 아닌 것이 된다는 "좁혀진 진보"의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김진석이 실천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일까. 한국의 출판계에서 리버럴리즘을 진보주의로 번역하는 관행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진보 용어는 과학적 기준 없이 단지 문학적 수식어로 사용되고 있다.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 사용한 다음 걷어차버리는 사다리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김진석 같은 학자가 앞으로 진전된 연구를 통해서 혼란의 거품을 걷어주길 기대한다.

필자주 : "사색진보의 발견" 세 번째 글입니다. 사색진보는 레프트, 리버럴, 어드밴스, 라이트 등 네 개의 이념 정파가 자신만이 진보라고 주장하는 현상을 표현한 말입니다. 앞으로 현실 속에서 각 이념들이 서로 다투는 모습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리버럴과 레프트의 충돌을 다뤘습니다. 앞으로 리버럴과 어드밴스, 리버럴과 라이트, 어드밴스와 라이트, 어드밴스와 레프트, 라이트와 레프트, 레프트와 레프트의 충돌과 대립을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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