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봄날, 지영선 전 보스턴총영사를 만나다
청명한 봄날, 지영선 전 보스턴총영사를 만나다
발행인 양수연의 서울에세이
2009년 04월 20일 (월) 보스턴캡
http://www.bostonkap.com/detail.php?number=6767&thread=11r01r13
▲ 삼청동에서 만난 지영선 전 보스턴 총영사
1년 만에 그녀를 만났다. 보스턴을 떠난 그녀로부터 “아직 버스 노선 찾느라고 좀 헤매고 있다”가 마지막 안부였다. 버스카드를 손에 쥔 그녀의 모습이 선했다.
지영선 전 보스턴 총영사. 최초의 여성 총영사라는 딱지를 달고 보스턴에 왔을 때 보스턴 한인들은 잠시 술렁였었다. 귀해서 홍일점이 아니라 희한해서였다. 당혹스럽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글발 세우기가 녹록치만은 않았던 그 시절을 고스란히 건너온 여기자에게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이라는 말은 쉬이 입에 붙지 않았을 게다. 고국에 대한 애정과 갈증이 다각도의 형상으로 범벅이 된 이 사회를 그녀는 애틋한 시선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교민 서비스라는 것이 천편일률적이겠거니 여겼던 나였지만 그녀가 온 뒤로는 새삼 그것에 눈길이 가는 게 변화라면 변화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을까? 다양한 문화 사업들이 그녀의 손을 거쳐갈 때 교민들은 색다른 행복감을 맛보았다. 보스턴을 방문한 가야금 명인 황병기는 “참 대단한 여성” 이라며 탄성을 내었다. 총영사 임기가 끝나가자 사람들은 서로 들은 것이 있나 싶어 그녀의 귀국일자를 물으며 아쉬움을 주고 받았다. 헤어질 땐 말없이, 다시 만날 땐 환호작약이라고 했던가.
건조주의보 수십일, 여기저기 산불이 속출하고 마른 먼지에 마른 침을 삼켜야 했던 서울에 간만에 단비가 내렸다. 이 날, 삼청동의 한적한 식당에서 떠들썩한 수다가 시작되었다. 자전 에세이 <나이 먹는 즐거움>을 보스턴캡에 소개하는 것을 허락했던 언론인 박어진 씨와 대화하며 저렇게 나이 들면 참 좋겠다! 탄성을 지를 무렵, 지영선 총영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색 투피스에 화사한 가방이 참 잘 어울렸다. 옷도 예쁘게 참 잘 입는 사람이었지!
지영선 총영사는 지난 달 말 환경운동연합 (환경련)공동대표로 선임됐다. 전국 회원 8만 명, 상근 활동가 2백 명에 달하는 한국 최대의 시민단체를 이끌어야 할 임무를 맡은 것이다. 참여정부에서 관직에 나갔던 상당수 인사들이 본업으로 돌아갔다. 총영사 임기를 마친 그녀가 무슨 일을 할 지 보스턴 사람들은 관심이 많았다. 본업인 언론사 일을 택하지 않고 그녀는 시민들과 함께 하기로 했나 보다. 그러나 환경련은 지난 해 말, 일부 간부의 횡령 사건으로 한바탕 진통을 겪은 바 있다. 정부에서는 시민단체의 지원금을 줄이겠다고 강력히 경고했고, 시민단체들의 도덕성에 의문을 품고 말았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새로운 대표로 선임된 것이 지영선 총영사이다. 시민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또한 그녀의 역할로 떨어졌음에 분명하다.
한겨례 논설위원 권태선 씨, 코리아 타임즈의 김흥숙 기자가 자리에 합류하자 분위기는 금새 시끌벅적해진다. 삼청동이 참 좋구나. 총리공관 앞의 군인들이 참 멋있네! 와인을 시킬까 소주를 시킬까…. 미국에서 왔으니 소주가 더 귀하겠구나.
여러 소소한 얘기들이 오고 갔다. 얼마 전 엎어지고 다쳐 골탕 먹은 이야기, 영화 이야기, 음식 이야기, 한 다리 걸치니 서로 아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 참 좁구나 하하하. 30년을 언론인으로 살아온 이 여성들에게 지 총영사는 존경하는 선배이자 동지였다 (권태선, 김흥숙, 박어진 씨는 30년 전 코리아 타임즈 기자들로 만나 지금껏 우정을 과시하고 있다. 박어진 씨의 <나이 먹는 즐거움>에 등장인물로도 출연한다).
지 총영사는 보스턴에 대한 추억을 잠시 풀어내기도 했다. 그 분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저 분은 건강하신지, 보스턴 한인들에 대한 안부 물음도 참 다정하였다. 한국 영화제가 보스턴에서 계속 이어지면 참 좋을텐데….아쉬움 묻어난 소리에 한바탕 문화예술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가기도 했다.
코리아 타임즈 김흥숙 기자는 워낙 시원시원하고 재치가 있어 통할 것이 많은 여자였다. 작문실력도 대단하고 사회를 보는 시각도 날카로웠다. 기자가 왜 기자겠어…. 속으로 웃음이 났다. G20 금융정상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Korea is America's one of greatest friends” 라고 말한 것을 조선일보 등등이 “한국은 위대한 친구” 라고 번역했더라. 그냥 좋은 친구들 중 하나라는 뜻인데 말야. 또 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화제를 중심으로 이끌고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똑 부러졌다. 지 총영사는 말없이 듣고 웃음을 보태고 맞장구를 치는 게 많아 후배들을 마냥 흐뭇하게 보는 모양새였다. 보스턴에 살아본 적이 있다는 권태선 논설위원은 보스턴 사는 재미를 내 맘껏 풀어내어도 지루함 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한겨례 21> 최근호 커버스토리는 “굿바이 노무현”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표지였다. 지하철에서 사서 읽고는 나도 인생무상 정치무상을 한탄했었다. 한겨례, 경향신문 등 진보계열 신문들은 검은 돈 받은 혐의를 받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매질은 그리 혹독한 것이었다.
“잘못했으면 벌 받는 게 당연한 것이죠”
권태선 논설위원의 말에 잠시 숙연……그러나 금새 여자들의 수다는 계속되어갔다.
비가 그쳤을까? 총리공관 앞 군인들은 여전히 곧은 자세로 서 있다. 삼청동이 얼마나 변했는지 모른다. 예쁜 옷 가게가 즐비하고, 멋을 부린 와인 바, 조촐한 한정식 집, 우아한 갤러리는 훨씬 더 많아지고 길가에서도 삐죽삐죽 보이는 한옥 담도 멋스러움이 한껏이다.
어둠이 내리깔리니 택시는 없다. 인적이 드문 거리, 여자들은 삼청동 길을 한참 걸어 내려와 옛 중앙청을 지나갔다. 여기가 촛불시위 현장이기도 했지. 누군가 설명을 보탰다. 그리고 꽃 이야기를 했다. 단비의 촉촉함을 머금은 상큼한 꽃 향기가 어디선가 나풀대었기 때문이다. 라벤다 향 같은 것이었다. 청명하고 맑았다. 꽃 보다 여자들에게 향기가 났다. 찰스 강도 이제 곧 벚꽃이 피어나겠지. 그리움 때문인가? 수 시간을 미처 물어보지도 못한 질문이 떠올랐다.
“보스턴에 어떻게 안부를 전할까요?”
“그냥 잘 지낸다고 전해 주세요. 잘이요.”
택시 기사는 단비가 내려서 고맙기만 하다고 말을 건넨다. “덕분에 비무장지대 산불도 저절로 꺼졌대잖아요.”
나는 수첩을 꺼내 서울에서 만남의 목록 가운데 이름 하나를 지웠다. 그리고 그 옆에 꽃 향기 보다 더 좋았다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