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통 자문위원 ‘물갈이’ 드라이브
[특집]평통 자문위원 ‘물갈이’ 드라이브
2009년 03월 24일 (화) 위클리경향
2009 03/24 위클리경향 817호
교체 대상 중 여당 몫이 절대다수… 이념 보수화 쏠림 현상 우려
대통령자문 헌법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평통)가 자문위원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평통은 국가원로자문회의, 국가안전보장회의 등과 함께 헌법상 명시된 대통령 자문회의로 자문위원은 무보수 명예직이다. 하지만 이 자리를 놓고 치열한 이해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임명장 한 장은 지역사회에서 유지로 행사할 수 있고, 특히 해외 자문위원의 경우 특전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평통 자문회의는 오는 6월 말로 제13기 자문회의가 끝나고 7월 1일부터 제14기 자문회의가 출범한다. 현재 평통은 각 정당 대표, 시·군·구 자치단체장, 중앙부처 장관, 이북5도, 해외공관장에게 14기 자문위원 추천받고 있으며, 인선 작업을 진행 중이다. 평통은 3월 중으로 일반 자문위원을 확정하고 4~5월에는 간부를 선발하는 등 5월 20일까지 14기 자문회의 구성을 마칠 계획이다. 14기 자문회의는 7월 1일 서울 잠실 올림픽 경기장에서 국내외 자문위원 1만5000여 명이 참석해 출범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자문위원 추천 국내외서 불협화음
13기 자문위원의 경우 국내에서 ▲직능대표 1만1369명 ▲지역대표 3445명(광역의원 696명, 기초의원 2749명)과 재외동포 대표 1977명 등 총 1만6791명으로 구성됐다. 이번에 바뀌는 자문위원은 지역대표를 제외한 직능대표와 재외동포 대표로 1만3000여 명이 대상이다. 특히 14기 자문위원 인선은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바뀜에 따라 대대적인 인적 쇄신이 예상된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대통령을 자문하는 평통 자문위원 구성에서 이념적 쏠림 현상이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이번에 바뀌지 않는 지역대표 3445명 중 2179명(63%)이 한나라당 소속인데다 자문위원 추천권이 있는 시·군·구 자치단체장도 (전체 197명 중 155명으로) 한나라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정부 각 부처와 이북 5도 해외공관장 등도 여권의 일원으로 보수와 진보의 균형을 맞추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14기 자문위원 추천과 관련해 국내외서 불협화음도 끊이지 않고 있다. 실제 여당의 한 의원은 선거 때 도와준 사람을 챙기려고 10여 명의 자문위원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관계자는 “중앙당으로 내려오는 평통 자문위원 할당인원이 모자라서 한 여당 의원이 직접 평통 고위 인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해결했다”고 말했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선진국민연대(동행대한민국) 출신의 김대식씨가 평통 사무처장으로 활약함에 따라 선진국민연대와 관련한 소문도 끊이지 않고 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선진국민연대 사람들이 최근에 평통 자문위원에 추천시켜주겠다는 말을 하고 다닌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김대식 평통사무처장은 “그 사람들은 자문위원 추천 권한이 없다”며 강력히 부인했다. 다만 김 처장은 “선진국민연대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지자체장들에게 평통위원을 해보고 싶다는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겠다”고 말했다. 여기에 청년층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40대 이하를 대상으로 온라인으로 추천받던 자기추천제도 폐지돼, 진보 성향의 청년층의 자문위원 진입 기회도 봉쇄됐다.
평통 측이 추진하는 ‘통일무지개 운동’도 논란이 되고 있다. 평통은 자문위원 한 사람이 6명씩 ‘10만 통일일꾼(통일 준비위원)’을 모집하고 있다. 평통은 이를 바탕으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적 통합을 이루고 남북통일 운동을 벌이는 ‘무지개 운동’을 벌일 예정이다. 즉 평통은 대대적인 국민 동원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의 통일정책에 대한 지지그룹 역할을 하겠다는 것. 이에 대해 국회 관계자는 “대통령자문기구가 ‘10만 통일일꾼’을 조직하는 것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는 전위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평통은 통일부와 통일교육원에서 담당하는 통일교육 기능도 평통으로 대폭 일원화하려 하고 있다. 김 사무처장은 “통일교육원은 조직이 없으니까 한계가 있다”면서 “통일교육원에서 강사는 파견할 수 있겠지만 (통일교육의) 판은 우리가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외 조직 확대 정치세력화 우려
더욱더 문제가 되는 것은 평통이 해외 조직을 대폭 확대한다는 점이다. 평통은 현재 58개국 1977명에서 109개국 2600여 명으로 해외 자문위원을 30% 늘린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해외 자무위원직을 놓고 싸움을 벌였던 동포사회가 다시 한 번 극렬하게 분열될 전망이다.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평통협의회 분리안을 놓고 지역 간 분열양상이 극심했다. 최근 평통 로스앤젤레스협의회는 로스앤젤레스협의회와 샌디에이고·오렌지카운티협의회로 확대, 분리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김재수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가 평통협의회의 분리를 주도함에 따라 현지 동포들의 비난을 샀다. 미국 영주권자 상태로 임명돼 논란이 있었던 김 총영사는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 BBK대책단의 해외팀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특히 평통의 해외 지역협의회 확대는 재외국민 참정권 허용에 따른 정치조직화 가능성도 있다. 현재 한국 국적을 보유한 재외국민 300여만 명 중 선거권을 가진 사람은 전체의 80%인 240만 명이다. 이중 총선 등 실제 투표 참가자는 130여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역대 대선·총선 등에서 근소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됐다고 볼 때 재외동포 유권자들의 힘은 막강할 것으로 예상된다. 15·16대 대선에서는 각각 39만 표, 57만 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됐으며, 국회의원은 3표차로 승부가 갈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용현 로스앤젤레스한민족평화연구소장은 “로스앤젤레스지역의 대체적인 여론은 충성심 많은 총영사가 재외국민 참정권 시대를 맞아 해외 표심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평통의 조직을 세분화하기로 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평통은 또한 지난 연말 운영·상임위 합동회의를 통해 협의회 관할지역의 재외동포 주요 인물 데이터베이스와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성공한 동포 기업인과 주류 사회에 진출한 전문가 그룹 ▲재외동포 1세대와 차세대 간 교류 활동 ▲현직 자문위원과 전직 자문위원 간 교류활동 등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최근 호주, 뉴질랜드, 인도네시아 등을 방문하면서 “해외 동포 700만 네트워킹 자료를 만들겠다”고 공언함으로써 평통의 계획에 힘을 실어줬다.
김대식 사무처장 대통령 신임 두터워
이에 따라 평통이 외교통상부 등 힘있는 부처를 제치고 700만 해외 동포의 네트위크 구축작업을 주도할지 주목된다. 이와 관련해 평통이 재외동포 네트워크 강화를 추진하는 것은 외교통상부 산하 재외동포재단과 업무 중복 논란도 빚고 있다. 재외동포재단의 중점 업무에는 내외동포 교류 활성화를 통한 ‘글로벌 코리아’ 실현, 온라인을 통한 재외동포 네트워크 강화 등이 있다.
국내외에서 평통의 폐단을 지적함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평통 폐지론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실제로 헌법에는 5개 대통령 자문기구가 규정되어 있지만 이중 현재 설치되지 않은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뺀 나머지 자문기구는 말 그대로 자문 기능에 충실하도록 운영되고 있다. ‘국가안전보장회의’는 6인 외 약간 명, ‘국민경제자문회의’는 37인 외 약간 명,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는 15인 이내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특히 대통령령으로 설치된 통일고문회의도 운영하고 있다.
한편 평통이 다른 부처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강한 드라이브를 걸 수 있는 이유는 실세인 김대식 사무처장이 있기 때문이다. ‘왕사무처장’이라고 불리는 김 사무처장은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과 함께 이명박 대통령의 숨은 실세다. 2005년 부산 동서대 학생처장 시절 대학 강연을 온 이명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그는 이 대통령의 친위조직인 안국포럼에 38번째로 가입할 만큼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다. 지난 대선 때 그는 선진국민연대라는 사조직을 이끌고 이 대통령이 당선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특히 이 대통령은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경선에서 간발의 차이로 이겨서 몹시 화가 났을 때 유일하게 김 사무처장만 일 잘하는 사람으로 언급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했다. 그는 최근의 근황에 대해 ‘고양이 손도 빌리고 싶다’는 일본 속담을 인용하며 “화장실 두 번 갈 것을 한 번 가면서 바쁘게 지낸다”고 말했다.
평통 개정 법률안 발의는 ‘금기’
민주당 송민순 의원은 최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가 철회하고 다시 제출했다. 송 의원의 법안은 1700여 명의 평통자문위원을 10~30명으로 대폭 축소하는 내용으로 사실상 평통 자문회의를 폐지하자는 파격적인 내용이다.
송민순 의원은 왜 같은 내용의 법안을 국회에 두 번 제출했을까. 거기에는 사정이 있다. 송 의원은 이 법안을 본인을 포함해 20명에게서 공동 발의를 받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공동발의자 중 한 의원 측이 공동 발의를 철회하겠다는 연락을 하는 바람에 송 의원은 국회법에 따라 국회에 이미 제출한 법안을 철회하고 다시 의원들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했다.
법안에 서명을 철회한 의원은 지역구 평통자문위원들에게서 “서명을 철회해달라”는 강력한 요청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국회 주변에서는 평통 사무처 측에서 지역 자문위원들에게 이 같은 정보를 알려줘 철회하도록 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떠돌았다. 이에 대해 평통 관계자는 “결코 그런 액션을 취한 적이 없다”고 강력히 부정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이 법안의 철회와 재제출 과정에서 민주당 김재윤·우윤근 의원과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이렇게 평통을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내용의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은 국회의원들에게는 금기 사항으로 내려오고 있다. 특히 지역구 의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관례적으로 선거에서 당선을 도운 사람들에게 보은 차원에서 평통 자문위원직을 줬기 때문이다. 여당 의원들은 야당보다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81년 평통 자문회의가 설치된 이후로 국회의원들은 많은 폐해를 지적했지만 여지껏 국회에 제출한 것은 평통 폐지법안 3건과 평통 축소법안 3건 등 6건이 고작이다. 실제로 역대 대통령 후보들도 공약에서는 평통 폐지를 주장한 반면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평통 개혁 의지가 퇴색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후보 때는 평통 폐지를 약속했지만 당선한 이후에도 평통은 계속 존속했다.
이기택 민주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월 23일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 강당에서 인도네시아 교민대표와 학생 등을 상대로 ‘상생·공영 대북정책과 민주평통의 시대적 역할’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뒤 평통 서남아협의회 위원 및 교민대표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