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골치 아픈 문제, 정치권에선 찬밥 신세
골치 아픈 문제, 정치권에선 찬밥 신세
2002년 05월 24일 (금) 주간동아 111
▶ 우/리/도/국/민,/참/정/권/달/라
비용 만만찮고 정치성향 파악도 어려워 … OECD 가입국 중 한국만
재외국민 참정권 외면
참정권을 회복하려는 재외국민들의 노력이 거세게 일고 있지만 정치권의 반응은 무관심 그 자체다. 지난 97년 대통령선거 정국에서도 불거졌다가 유야무야된 이 문제가 다시금 불거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정치권의 이런 반응은 무엇보다 이 사안에 대해 여론이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고 보기 때문인 듯하다. 또 재외국민들이 참정권을 갖게 되었을 때의 성향, 즉 표가 여야 어느 쪽으로 몰릴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도 이를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중요한 요인으로 보인다.
그런 한편으로 당위성 차원에서 이 사안을 꾸준히 준비해 온 의원들도 있다. 민주당 정범구, 한나라당 이부영 의원이 그들이다.
정범구 의원은 지난 2월7일 이 사안과 관련해 국회 공청회를 갖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으며,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재외국민의 참정권 부여 범위를 묻는 설문조사까지 했다. 반응은 저조했지만, 설문조사에 참가한 응답자들은 ‘국내 주민등록이 있는 재외국민에게만 참정권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에 45%, ‘주민등록에 관계없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모든 이에게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에 43%의 지지를 보였다. 응답자의 88%가 재외국민의 참정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답한 것.
이후 정의원은 재외국민 중 주민등록이 유지된 자가 신청하여 투표할 수 있도록 선거권자를 한정하는 내용으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 방지법’ 개정안을 정하고 발의를 위한 의원 서명작업에 들어갔다. 정의원은 “이르면 6월 임시국회에서 법률을 통과시켜 올해 대선 때 재외국민들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방침”이라면서 “의지가 있고 여론만 받쳐준다면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정범구 이부영 의원 문제제기 법 개정 추진
그러나 아직 의안발의 요건인 20여명의 의원 동의도 받지 못한 상태인 데다 민주당에서 당론으로 정해진 내용도 없어 법 개정이 가능할지 여부는 상당히 불투명한 상태다.
95년부터 이 사안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온 한나라당 이부영 의원은 97년 6월 당시 신한국당 소속으로 재외동포 138명과 여야 의원 12명의 서명을 받아 ‘재외국민 선거권 보장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은 재외국민 부재자 투표제도를 도입할 경우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들며, 동포사회가 여야 지지자로 갈려 반목과 갈등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논의를 중단했다.
5년 뒤인 지난 1월 초 이부영 의원은 외국 체류 기간이 5년 미만인 재외국민이 대통령 선거 및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선거 관련 법안을 다시 만들어 의원 공동발의를 위한 서명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13명만 이 법안에 동의했는데 이부영 의원은 다른 의원들로부터 “해외 거주자 투표를 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해야 하느냐”는 성의 없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정범구 의원과 이부영 의원은 개정안 가운데 투표권 부여 범위를 조금 다르게 하고 있지만, 출국한 지 5년 미만(약 30만명 추정)이거나 주민등록을 말소하지 않은 사람부터 투표권을 주기 시작해 점차 범위를 넓혀가자는 쪽으로 의견을 좁히고 있다.
재외국민의 참정권 부여 범위를 어느 선까지 정하느냐는 사실 정치권에서는 가장 민감하게 다룰 수밖에 없는 문제다. 추가 비용과 기간, 공정성 시비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이종훈 국회 정치담당 연구관도 내국민과의 형평성이나 동질성 등을 고려해 단계적으로 도입할 경우 △해외 거주 일시체류 재외국민 △국내 거주 장기체류 재외국민 △해외 거주 장기체류 재외국민 △영주권자 등의 순으로 투표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재일동포 이건우씨나 한겨레네트워크 등은 우리나라 재외국민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뜻에서 전면 허용 쪽으로 나가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 등으로 끌려가 1세는 사망하고 2세, 3세들이 대부분인 현실을 고려하면 제한적 허용론은 민족사의 수난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사는 그들에게 또 한 번의 절망을 안겨주게 된다는 것이다.
해외 각국의 추세는 전면적인 허용 쪽으로 나가고 있다. 독일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미국이나 일본 프랑스 등 대부분의 선진국이 거주 기간에 관계없이 모든 재외국민에게 선거권을 주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해외에서 대표를 국회에 보내는 제도까지 있을 정도다.
제한적 허용이든 전면적 허용이든, 재외국민 참정권 문제는 조만간 정치권에서 결말을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재외국민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고, OECD 가입국 가운데 우리나라만 재외국민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 등은 97년 대선 당시 이 문제와 관련해 김대중 이회창 김종필 후보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냈다. 그러자 세 후보 모두 당선되면 임기중에 재외국민 참정권을 도입하겠다는 취지의 답변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 이에 대한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연말 대선에 나서는 후보들도 무관심하기만 할 뿐이다.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는
“구체적 논의 한 바 없다” 적극적인 의지 부족
“정책적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다. 관련 상임위(통일외무통상) 전문위원들과 통화해 보라.”
“재외국민 참정권 문제와 관련, 이회창 대선후보의 입장을 밝혀달라”는 질문에 한나라당 정책실 한 관계자가 내놓은 답변이다. 그 직후 이뤄진 관련 상임위 전문위원과의 전화통화에서도 구체적 입장은 듣지 못했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 진영도 마찬가지. 노후보의 한 측근은 “아직 (재외국민 참정권 문제와 관련) 후보와 조율한 적이 없고 앞으로 시간을 가지고 차분하게 준비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다른 한 측근은 “후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여야를 대표하는 대통령후보인 노무현 이회창 후보의 재외국민 참정권에 대한 입장은 ‘무관심’ 수준이다. 정책적 배려나 관심을 기울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지난 4년 동안 외면했던 문제인데 선거를 코앞에 두고 신경 쓰겠느냐”고 말한다.
해외교민의 투표권 문제는 지난 97년 대선 당시 언급된 적이 있다. 이회창 후보는 당시 재외국민 참정권 문제와 관련, 공개질의서를 받고 “당선되면 임기중 재외국민 참정권을 도입하겠다”고 말한 바 있고,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김대통령과 이후보는 4년이 지난 최근까지 이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재외국민 참정권 문제가 이처럼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은 참정권에 대한 정치권과 정부 및 재외국민들의 적극적인 의지 부족(한나라당 한 관계자)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물론 재외동포법 등과 관련한 현지 국가와의 외교적 마찰 문제 등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여야 후보 진영에서는 “재외국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경비, 현지 교민들의 반목과 갈등 등 생각 밖으로 많은 희생이 따른다”며 “유대인이나 중국 상인들처럼 현지화에 힘을 쏟아 현지의 주류사회로 편입하는 세계화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반론을 내놓기도 한다.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