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천사제안] 나도 투표하고 잡다
천사제안] 나도 투표하고 잡다
2002년 02월 12일 (화) 베를린리포트 11
◆[천사제안] 나도 투표하고 잡다
나와 같은 해외 체류자도 엄연히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국민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총선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권리가 있다. 헌법 24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원칙'일 뿐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이곳 독일에 체류하기 시작한 약 8년 동안 2번의 대통령 선거와 2번의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몇 번인가 지방자치제 선거가 있었지만, 내게는 투표 고지서 하나 날아오지 않았다.
나는 적어도 외국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고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철저한 국외자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투표권 제한의 법적 근거
도대체 해외 체류자의 투표권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이러한 제도와 관행은 어떤 법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현행 통합선거법 중 부재자 투표를 규정하고 있는 제38조 1항에 따르면 "국내 거주자 중… 선거일에 자신이 투표소에 가서 투표할 수 없을 때에는…부재자신고를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그러므로 '국내 거주자 중'에 속하지 않는 해외 체류자는 당연히 부재자 신고를 할 수 없다.
해외 체류자인 내가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가서 "난 꼭 투표를 해야겠다"고 우기면 아마 "그럼 비행기 타고 한국 들어가서 투표해라"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해외 체류자에게 투표권이 명시적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부재자 투표라는 선거법 상의 편의 제공이 거부됨으로서 실질적으로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이 논리는 뒤에 언급할 헌법재판소의 판결에서 중요한 논거가 된다. 즉 현행 선거법은 해외 체류자에게 편의 제공을 거부하고 있으나, 이것이 투표권 제한은 아니라는 것이다.
재외국민의 투표권은 지난 66년 대통령선거 당시 법률로 보장하기 시작해 67년과 71년 대선때 파월 국군과 서독취업 광부, 간호사 등이 투표권을 행사한 바 있다. 그러나 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법 시행으로 대통령선거법이 폐지되면서 국내 거주자만 부재자 투표를 할 수 있 도록 규정이 개정되었고, 그 이후 해외체류 국민은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본국에 주민등록이 돼 있는 일시 해외체류자는 대략 29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 국적을 가진 재외 국민의 수는 자그마치 5백만 명에 달한다.
▶ 투표권 제한의 논리
해외 체류자의 부재자 투표에 대해 반대하는 측에서는 이러한 제도를 도입할 경우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는 이유를 든다.
우편투표든 해외공관 투표든 투표용지를 작성, 회수에 일본 등 동아시아는 최소 13일, 서남아시아와 미국, 유럽 등은 16일, 아프리카와 남미는 23일씩 걸린다고 한다. 현행 선거법상 대통령 선거기간이 23일인 점을 고려하면 이는 현실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공직선거법 제33조 제1항은 선거별 선거기간을 대통령선거는 23일, 국회의원선거와 지방자치단체의 장선거는 17일, 지방의회의원선거는 14일로 규정하고 있다.)
결국 해외 체류자의 참정권 보장 여부는 선거기간의 길이와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또한 해외에서는 부재자 투표의 관리가 현실적으로 어려워 투표결과에 부정이 개입될 소지가 크고, 선거 기간을 늘릴 경우 선거비용이 적지 않게 늘어난다는 점이 부재자 투표 도입에 대한 부정적 논리가 되고 있다.
▶ 법 개정 노력의 좌절
지난 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는 국회 정치개혁특위를 구성해 재외 국민의 선거권 문제 등을 다루었다. 당시 야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공동으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통칭 통합선거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여기에는 재외국민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당시 야당인 신한국당은 재외국민 부재자 투표제를 도입할 경우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면, 동포사회가 여야 지지자로 갈려 반목과 갈등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면서 반대했다.
결국 대선을 앞두고 이루어졌던 재외국민 투표권 재도입 노력은 막판에 야당도 미온적 태도를 보여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 헌법 소원과 좌절
한편 97년 대선을 앞두고 해외 체류 국민의 선거권 보장을 주장하는 2건의 헌법 소원이 이루어졌다.
당시 파리에 거주하던 유학생과 상사원 등은 해외에 일시 거주하는 국민한테도 부재자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제38조 1항 등에 대해 위헌 확인을 구하는 헌법소원을 냈다.
또한 재일동포 2세 8명은 주민등록이 돼 있지 않은 대한민국 국민을 선거인 명부에 등재하지 않도록 한 규정 때문에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선거권과 평등권 등을 침해당했다는 취지로 위헌 확인을 구하는 헌법소원을 헌법재판소에 냈다. 재일동포들은 '혈통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 국적법상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있는 20세 이상 교포는 틀림없는 '대한민국 국민'인데도, 정작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지 않은 것은 명백히 헌법이 보장한 선거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헌재가 이들의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위헌을 확인할 경우 해외 일시거주자 29만여명과 재일동포 66만여명 등 95만여명이 97년 대선에서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돼 커다란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었다.
그러나 헌재는 이 규정에 대해 헌법 합치 판결을 내렸다. 다음은 헌재가 첫번째 헌법소원에 대해 내린 '결정 요지'이다. 아래에 길지만 전문을 인용하겠다. 일시 해외 거주자에 대한 선거권 보장도 이루어지지 않는 다음에야 재일동포들에 대한 선거권은 말할 것도 없겠다.
"1.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 제38조 제1항은 국민 중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국민에 대하여 부재자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고 있을 뿐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국민에 대하여서는 부재자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으므로 이른바 부진정입법부작위에 해당한다.
2.현행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상 해외에 거주하는 국민 모두에게 부재자투표를 허용하기 위해서는 선거기간을 연장하여야 하는데, 이는 국가와 후보자들의 선거비용 증가 등 그로 인한 국가적 부담이 가중되는 문제를 초래하게 되고, 국내보다 훨씬 공정선거감시 체제가 미약할 수 밖에 없는 해외에서는 선거의 공정성을 확보하기가 더욱 어렵다. 또한 해외거주자들은 투표권 행사에 장해가 되는 사유를 스스로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국내에 거주하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므로 자발적으로 출국하여 해외에 거주하는 국민들까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해외에 거주하는 국민들에 대하여 부재자투표를 실시하는 데에는 훨씬 많은 비용과 시간을 소요하게 된다. 따라서 비록 해외거주자들에 대하여 부재자투표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차별을 한다고 할지라도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3.해외거주자들에게 부재자투표에 의한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 여부는 이들의 선거권 자체에 관련된 문제라기보다는 선거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편의를 제공할 것인지 여부에 관한 문제로서, 어느 정도 범위의 국민까지 부재자투표를 허용할 것인지 여부는 입법재량의 범위에 속하는 문제이지 이로 인하여 국민의 선거권 자체가 제한되는 것은 아니므로, 위 같은 조항에 의하여 해외거주자들의 선거권 자체가 침해되었다고 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 1999.3.25.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 제38조 제1항 등 위헌확인")"
▶ 헌재 판결에 대한 비판 및 제언
이러한 헌재의 판결은 선거권 보장을 기다리고 있던 해외 거주 국민들에게는 커다란 실망이 아닐 수 없다.
헌재는 해외 거주자들에게 부재자 투표권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 입법재량의 문제이지 선거권 자체의 제한은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지나친 형식 논리가 아닐 수 없다. 해외거주자가 투표만을 위해서 귀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때 현행 규정은 국민의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해외 거주자는 투표권 행사 장애 요인을 스스로 초래했기 때문에 다른 부재자 투표권을 가진 국내 거주자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헌재는 밝혔다. 헌재는 해외 거주자의 투표권 제한 문제를 '죄와 벌'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는가? 문제의 핵심은 현재 선거권이 제한되고 있는 해외 거주자의 참정권을 온전히 보장해 주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지, 누가 현재 상황에 '책임'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한편 헌재의 핵심 논리는 역시 선거 비용과 선거의 공정성 문제라고 하겠다. 헌재는 현행 법률의 선거 기간 규정상 해외 거주국민 부재자 투표는 어렵고 선거 기간을 늘린다면 선거 비용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해외에서는 부재자 투표의 공정성 여부를 감시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에는 한국의 선거 관행상 일부 수긍할만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일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재외 국민의 우편 투표가 순조로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때, 왜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해외에 거주하더라도 국민인 이상 선거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원칙의 문제이며, 선거 비용과 공정성 문제는 이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해결해야 할 기술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을 서로 뒤바꿔서 생각하는 것은 결국 행정 편의주의의 의혹이 짙다고 아니할 수 없다.
해외에 일시 거주하는 국민은 약 30만 명으로 총선이나 대선의 향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숫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부당하게'(헌재는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제한받고 있는 단 한 사람의 권리라 하더라도 시정해야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고 본다.
다른 한편 해외 거주 국민은 앞서도 말했듯이 5백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거대한 인적 자산을 활용하는 것은 국가적 과제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외 거주 국민들에게 올바른 참정권 행사가 보장될 때, 이들의 고국에 대한 소속감과 정치적 관심은 더욱 제고될 것이다.
해외 동포의 선거권 문제는 근시안적인 당리당략이나 행정 편의주의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민들의 역량을 모아낼 수 있다는 차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