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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너무 미국화" <인터뷰> 프랑스 동포신문 오니바 편집인 김제완씨

세계로김 2015. 11. 16. 16:44

"한국이 너무 미국화" 
<인터뷰> 프랑스 동포신문 오니바 편집인 김제완씨
 
 2001년 11월 08일 (목)  시민의신문  111 
 
 
 www.ngotimes.net 2001-11-08            

본지 프랑스 통신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프랑스동포신문 '오니바' 편집인 김제완씨(44)가 '재외동포문화제' 방문차 서울에 왔다. '오니바'는 '함께 가자'는 뜻의 프랑스어 합성어. 한국에서 보낸 80년대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동기, 타지에서 보는 한국사회와 한국사회운동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77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군대를 일찍 가 실제 학교생활은 81학번들과 같이 하다보니 정서적으로 386세대들과 가깝다는 김제완씨는 김지하의 시를 좋아하고 문학을 좋아하던 '자유주의자'였다며 말을 시작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든 건 대학 졸업 후 사회과학 출판사 편집부 생활을 하면서부터다. "출판운동을 하면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에게 영향을 받았어요. 말하자면 '늦깎이운동가'였던 셈이죠"

그는 이른바 '3세대 출판운동세대'다. 1세대가 70년대 말부터 활동을 하던 '창비'나 '한길사'와 같은 출판사라면 2세대가 80년대에 만들어졌던 '동녘', '풀빛', '한마당', '사계절' 등이고, 87년 6월 항쟁으로 열린 공간 속에서 만들어진 '백두', '일송정', '힘', '대동' 그리고 그가 만들었던 '오월' 출판사 등이 바로 3세대. 그는 '북한원전 출판러시'의 문을 연 출판인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른바 7·7선언으로 북한공산원전자료를 개방하겠다고 당시 정부가 선언했죠. 그래서 정부정책에 우리 출판인들이 호응하겠다, 해서 '조선통사'를 출판하게 된 겁니다."

도서출판 오월 창립 뒤 '조선통사' 발간으로 옥고

이때의 경험을 그는 '평생 잊혀지지 않을 대목'이라고 말한다.

"직원 세명에 저까지 포함해서 네 명이서 밤을 새면서 '작전'을 폈죠. 당시 올림픽이 있어서 경찰·보안관계자들이 모두 그쪽으로 집중되어 쉽게 배포할 수 있었습니다. 올림픽 때문에 학생들이 책을 사지 않을 거란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꽤 팔렸죠. 올림픽 이후 박종철 고문치사 관련으로 청문회도 있었고해서 경찰관계자들이 손을 놓고 있는 분위기였어요. 그러다가 89년 1월에 '민중의 바다' 등의 책으로 세 출판사 관계자가 구속되면서 다시 탄압이 시작되었죠."

그일로 그는 89년 5월초 사무실 앞에서 연행되어 치안본부 대공수사과에 잡혀갔다. "아마 그때가 홍제동에 막 이사갔을 때였을 거에요. 홍제동의 '첫 손님'이 아마 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그는 웃었다. 구치소에 있을 때 평양에 갔던 임수경씨가 들어와 그를 부르면서 힘내라고 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그가 '공부'를 결심한 것은 그가 집행유예로 나온 직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회의가 널리 퍼졌을 때였다. "유학이라도 가서 변화된 상황에 대한 정리를 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맴돌았죠."

사회주의 붕괴 보며 정리하러 유학길

그는 91년 7월 파리로 사회학 공부를 하러 떠난다. 그가 주제로 잡은 것은 '80년대 사회운동' 프랑스의 석학 알렝 뚜렌느에게 수학을 하게 되었다.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이틀 후에 바로 합격증이 나오더군요. 한국식으로 말하면 박사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박사준비과정에 들어갔는데, 뚜렌느가 그해가 65세였습니다. 사실상 한국인으로서는 제가 마지막 제자인 셈이죠."(그 전에는 사회운동연구소 정수복 소장이 88년 '70년대 사회운동'을 주제로 학위를 받았다고 그는 전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지만,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논문을 마치지 못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는다고 그는 말한다. "제가 35살에 유학을 갔으니 상당히 늦게 간 셈인데, 부모님에게 생계를 의존하기도 어려운 나이여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생각한 '일'은 당시 프랑스의 유학생 사회의 소식을 전하는 동포신문을 만드는 것. "프랑스에 유학 와 있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 싫어하는 것 같더군요.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처음 시작은 유학생사회에 왜 그런 현상이 생기는지에 대한 사회과학적 관심에서 출발했습니다."

동포사회 교류없는 것 보며 '다리' 역 하러 신문창간

'오니바'는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93년) "첫해 1년동안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것 같습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지역에서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여러 문제에 대해 '부드럽게' 말하는 신문이었거든요" 그가 전하는 '오니바'에 대한 반향이다.

'오니바'를 8년간 만들어오면서 가장 보람있었던 것은 '이유진선생 귀국운동'. "99년말부터 2000년 1월까지 수차례 인터뷰하면서 편집위원들이 총력을 다했습니다. 조사를 하면서 우리들은 이것은 무고하게 누명을 쓴 것이다는 확신을 갖게 됐고. 다행히도 한국에서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귀국하실 수 있게 되었죠."

최근에 그가 노력하고 있는 사안은 이수영 전프랑스대사 의문사 사건이다. "사건에 대해 의문사진상위원회에 진정을 했지만 현재는 기각된 상태입니다. 여러 방면으로 이 사건에 대해 명확한 진실을 밝혀지도록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는 지난 9월에 프랑스영주권을 받았다. 그가 꼭 덧붙이고 싶은 문제는 재외동포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보다 많은 관심이다. "해외동포의 참정권은 하루빨리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OECD가입국 중 한국과 일본, 이태리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참정권을 주고 있었죠. 일본은 재작년에 관련 법이 개정되면서 작년 6월부터 참정권이 보장되고 있고, 이태리는 2003년도부터 보장된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외교적 문제로 중국등과 마찰을 우려한다지만, 한민족 네트워크 구축의 핵심은 해외동포의 참정권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도좌' 시민운동으로 총집결 해야

다음은 한국 80년대 운동이 왜 90년대에 '단절' 되었는 지에 대한 그의 생각.

"80년대 운동권에 속하던 사람들이 90년대 들어와서 전부 바뀌었죠.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손을 놓아버린 이유가 뭘까 곰곰히 생각했었습니다. 사회운동은 권력에 대한 균형장치라고 생각합니다. 80년대는 정권이 극우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운동도 극좌였죠. 문민정권이 들어서면서 정권이 어느정도 중도우파로 성격이 변했고, 김대중 정권에 오면 그런 성격이 더 명확해졌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80년대의 패러다임도 중도좌파의 실천으로 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80년대 사회운동이 갖고 있었던 지사(志士)적 운동이 상황이 바뀌면서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현 상황에서는 시민운동에서 자기자리를 찾는 것이 자기운동의 일관성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앞으로의 계획은 동포신문을 벗어나 한국에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문화를 알리는 월간 '오니바'를 발행하는 일. 그가 보기에는 한국사회는 철저하게 미국화되어있다고 한다.  

"한국사회에서 계속 살아 왔거나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오면 그런게 잘 안보일 겁니다. 하지만 좌파정부가 오랫동안 집권하고 있는 프랑스사회에서 살다와서 보면 한국사회의 변화의 내용이 '미국화'의 길을 걷는 것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저항국가가 프랑스아닙니까? 문제는 한국사회에 사는 사람들도 별로 저항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데요. 보다 '부드러운' 유럽문화를 생생하게 전해줌으로써 어떤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글 정용인 기자inqbus@unitel.co.kr
사진 권우성 기자kws70@ngo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