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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국적] 세상읽기 이중국적

세계로김 2015. 11. 15. 17:24

[세상읽기] 이중 국적 
 

 2007년 11월 30일 (금)  헤럴드경제  
 
 

    
    
최연홍 <시인>


이중국적 논의 세계화 흐름과 보조를
국적포기 설움 선의의 피해자 없어야

대다수의 사람은 하나의 국적을 갖고 한 나라에서 살다가 간다. 이제 시대가 변해 태평양, 대서양을 건너 이곳저곳을 오가며 사는 이들이 많아졌다. 다국적기업이란 말이 일상용어가 된 지도 꽤 된다. 한국의 삼성, 현대, LG도 한국의 대표적 다국적기업이다. 세계화가 국경의 의미를 희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 속에서 한국에서 이중국적 허용이 논의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필자는 28년을 미국에서 살다가 병든 어머니와 몇 년을 함께 살기 위해 미국 국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으로 돌아갔다. 서울시립대에서 다른 선택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국가공무원법이었다. 1999년 당시 그것을 받아들인 선택 때문에 필자는 지금까지 고통을 겪고 있다.

필자는 1968년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갈 수 없어(반체제 문필인)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96년 서울시립대 대학원에 초빙됐다. 99년 전임교수가 됐을 때 미국 국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회복하는 조건을 충족해야만 했다. 서울의 미국대사관에서는 필자의 진술에 “강요에 의한 미국 국적 포기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판결을 통고해왔다. 그래서 ‘소설적’ 이유를 만들어 포기사유를 다시 작성해 미 대사관에 제출했고, 그 결과 미국 국적을 ‘어렵게(?)’ 상실했다. 그 덕에 한국 국적으로 2006년 은퇴할 때까지 서울시립대에서 가르칠 수 있었다. 그리고 2004년 3월 어머니는 유명을 달리하셨다.

2006년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 국적을 갖고 있는 아내의 소청으로 다시 미국 영주권을 신청, 미국 연방수사국의 신원조회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기다림의 고통이 만만치 않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이방인의 신원조회는 한층 까다로워졌다. 20여년 세월을 미국의 모범시민으로 살았지만 지금 미국 정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영주권을 얻을 때까지 28년 부은 사회보장 혜택도 받을 수 없다. 병이 나도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 미국 국적만 있으면 아프리카 밀림 속에 있어도 사회보장 혜택이 주어지지만 국적포기자에겐 이렇다. 어머니와 7년을 함께 산 대가를 달게 받고 있다. 그때 미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배려가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별수 없는 일이다.

국적 포기 얼마 후 외국 학자들이 한국의 국립대 교수로 채용됐다는 소식을 듣고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대한민국 법은 지금 생각해도 전근대적이고 불합리하다. 그때에도 권력과 가까운 사람들은 고위직에 있으면서 미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법의 한계 안에서 무력한 소시민들만 피해를 본 셈이다.

이민 1세대는 어쩔 수 없이 조국과 선택한 나라를 방황하며 살 수밖에 없다. 조국에서 태어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내고 2년의 군복무를 끝내고 외국에 고학생으로 나와 조국의 부모에게 생계비를 다달이 보냈던 아들이 조국에 가서 일할 수 있었던 기회가 오직 미국 국적 포기뿐이었다는 사실은 비감하다. 미국 영주권을 다시 받을 때까지는 외국여행도 불가능한 ‘영어의 몸’이나 다름없다. 한국 정부는 필자와 같은 이들에게 선처를 내리기를 기대한다. 미국 국적 박탈이 한국에 돌아가 일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아니었으면 한다.

군복무를 피하기 위해, 세금을 피하기 위해 외국 국적을 취득하는 이들에게 선처를 베풀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수많은 선의의 피해자를 생각해야 할 때다. 이민 1세대는 조국을 떠나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더욱이 시인은 모국어를 떠나 살 수 없는 특별한 이들이다. 이에 대한 이해와 동정이 필요하다. 이중국적 논의에 사려 깊어야 하는 이유다. 지나친 민족주의적 감정이 지구촌 시대, 세계화 흐름과도 동떨어진다.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는 별로 없다. 이는 외국에 나가 있는 인재, 두뇌의 한국 유치에도 도움이 된다. 국가 간의 왕래가 잦고 재외동포만 해도 600만명에 이르는 현실을 감안,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