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민 사랑으로 일군 방송 라틴의 태양처럼 뜨겁게 타올라야죠”
김성일 파라과이기독교한인방송 대표
2009년 04월 08일 (수) 기협회보
2009년 04월 08일 (수) 14:43:15 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t.or.kr
파라과이기독교한인방송(GBS)의 김성일 대표가 재외동포기자대회를 함께하기 위해 조국을 찾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수도 아순시온에서 칠레의 산티아고, 페루의 리마,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를 거친 42시간의 여정이었다.
파라과이.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조국의 동포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축구팬이라면 ‘골 넣는 골키퍼’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 정도가 생각날지 모르겠다. 그렇게 낯선 이억만리의 땅에서 김성일 대표는 5천여명 교민들의 눈과 귀가 되는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김 대표가 미지의 땅 파라과이를 밟은 것은 1986년. 변변한 한인 언론은커녕 고국의 소식을 접할 만한 수단조차 마땅치 않던 시절이었다. 교민을 위한 라디오 방송이라도 하나 있으면 어떨까 하는 소박한 욕심은 이민 십수년을 거치면서도 억누르기 힘들었다.
결국 선교활동과 개인사업으로 그런대로 터전을 마련했던 1998년, 지역의 한 라디오 채널에서 1시간을 빌려 간단한 방송을 시작하면서 꿈은 조금씩 현실이 됐다. 혼자 기자·프로듀서·아나운서로서 일인다역을 맡았다. 어려서부터 방송에 대한 선망은 있었지만 가난 때문에 ‘이루지 못한 사랑’이었다.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가진 것은 맨주먹 뿐이었다.
김 대표는 방송 초기의 그날을 잊지 못한다. 하루는 안테나에 이상이 생겨 방송에 차질이 빚어졌다. 사정을 모르는 동포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하늘에서는 구멍이 뚫린 듯 폭우가 쏟아졌다. 천둥번개가 으르렁댔다. 수리 기술자는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철사 하나를 질끈 입에 물고 안테나 탑을 올랐다. 말리는 가족의 손을 뿌리쳤다. “한순간이라도 방송을 중단시킬 수 없었습니다. 동포들을 실망시켜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고군분투의 나날 끝에 어느덧 교민들은 GBS에 주파수를 맞춰놓고 하루 일과를 보내는 데 익숙해져갔다. 2002년에는 KBS의 다큐멘터리 공모에 입선되는 경사도 있었다. 그러나 부푼 가슴으로 상을 받으러 조국을 찾은 사이, 고난이라는 불청객은 또 찾아왔다. 스튜디오에 화재가 나 피땀 흘려 모은 장비와 자료가 모두 불타버린 것이다. “전화위복이라고 자위했습니다. 가족이 다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백방으로 재기를 모색하던 어느 날, 한국의 한 송신기 회사에서 이메일이 왔다. “동포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김 대표를 위해 송신기를 무상으로 기증하겠다”는 소식이었다. 모든 회한이 쏟아져왔다. 전소된 폐허 현장을 보고도 참았던 눈물이 비로소 터졌다.
이제 GBS는 자체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하루 11시간 방송을 하는, 어엿한 ‘방송국’으로 자리잡았다. 비록 수익은 없고 기대하지도 않지만, 교민들의 사랑은 라틴아메리카의 뜨거운 태양처럼 타오른다. 주변에서는 좀 더 큰 나라로 가서 방송을 해보라고 권한다. “브라질도 있고, 미국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 파라과이에 남겠다고 다짐했다. 파라과이 교민들의 열정과 애국심은 어느 곳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일천한 이민 역사에도 이미 한인공원묘지, 체육공원에 전일제 한국인학교까지 만들었을 정도다.
“우리 교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알권리를 실현해주며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게 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동포 사회를 만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