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참정권, 일본 수출하세요”
2006년 04월 26일 (수) 한겨레21
5·31 지방선거부터 처음으로 외국인 영주권자들에게 투표권 부여… 서울시장을 누구 뽑을까 고민하는 일본인 3명의 주부들 이야기
히끼 유미꼬(43·경기 용인시)씨는 지난 17년 동안 하지 않았던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지난 4월15일 서울 명동의 한성화교소학교에서 만난 그는 “좋은 후보를 뽑을 자신이 있냐”는 물음에 “그러게요. 자신이 없네요”라고 머뭇거렸다. 남은 한 달 보름 동안 여러 가지를 보고 다른 사람들과 얘기도 많이 나눌 생각이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관심이 덜 하던 선거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 참이다. 이런 일들이 한국 땅을 밟은 뒤 처음 겪는 것들이지만 싫지 않은 고민들이다.
영주권 취득 3년 뒤부터… 대상자 6500여명
지난해 8월 공직선거법의 개정으로 이번 5·31 지방선거에서 처음으로 외국인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모든 외국인들이 투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거일을 기준으로 영주권을 얻은 뒤 3년이 지난 19살 이상의 외국인들에게 선거권이 주어진다. 올해 대상이 되는 인원은 6500여 명이다.
이마하시 아쓰코(오른쪽에서 두 번째)씨가 모의투표 용지를 받고 있다. 이마하시씨의 표심에 실릴 기대가 지방정치의 행정과 정책에도 반영될 수 있을까?
이들의 98% 이상은 대만과 중국 국적을 지닌 화교다. 다음으로 일본, 미국, 독일, 말레이시아, 아일랜드 출신 순이다.
모의투표소가 설치된 한성화교소학교에서는 이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외국인 유권자 80여 명을 대상으로 선거법 안내와 투표시연회를 열었다. 강당 앞 무대 위엔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된 외국인 대상 지방선거 투표 절차에 대한 설명회 현수막이 걸렸다. 그 아래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선거인명부 대조석과 투표용지 받는 곳, 기표소, 투표함, 참관인석이 차례대로 배치됐다.
한국인 남편과 자녀 셋을 뒀지만 태어난 곳의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히끼씨는 한국 땅에서 ‘외국인’으로 살고 있다. 한국에서 각각 20년, 16년 동안 살아온 이마하시 아쓰꼬(51·서울 잠실동)씨와 우께가와 마사미(42·서울 금호동)씨도 같은 처지다. 이들에게 선거를 치르는 것은 남의 나라 일이었고 가족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날이기도 했다. 히끼씨는 “(투표장에) 가족들이 다 가는데 나만 안 가니 아무래도 섭섭했다. 나만 다른 사람이라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우께가와씨는 “약수동에서 테니스를 같이 치는 한국분들이 오히려 저에게 ‘영주권이 있는데 왜 투표권이 없냐.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라며 에둘러 과거의 서운함을 드러냈다. 이마하시씨는 “솔직히 국적이 없으면 권리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거권이 없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어요”라고 말했지만, 그도 히끼씨나 우께가와씨처럼 남편과 함께 개표 방송은 빼놓지 않고 시청해왔다.
이들은 투표에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정치에 대한 관심 또한 적지 않았다. 이마하시씨는 “한국 사람도 잘못 뽑을 수 있는데… 자기가 잘못 찍었다며 엄지손가락을 잘라야 하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누구를 뽑죠? 누구한테 듣겠지만 모르면 정당을 보고 찍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특히 대통령은 임기가 5년인데 나라가 후퇴할 수도 있잖아요”라고 투표의 중요성을 말했다. 우께가와씨는 “아는 언니가 노무현을 좋아했어요. 처음엔 잘했는데…”라고 조심하면서 말끝을 흐리자, 이마하시씨가 “아니 수도는 왜 옮겨. 돈도 없고 어려운 사람들도 많은데…”라고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과 비판을 숨기지 않았다.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에게만 참정권이 주어지는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는 투표권이 없다고 중앙선관위 선거연수원의 김남이씨가 말해줬지만 아줌마들의 수다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선거 때마다 지역감정이 개입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관찰기도 빼놓지 않았다.
아시아에서 최초, 일본은 국회 계류 중
선거철 어깨띠를 두른 후보자가 지하철역에서 명함을 건넬 때마다 “저는 투표권이 없습니다”라고 사양했던 이마하시씨와 우께가와씨는 이번에 누가 서울시장이 될지 기자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용인에 사는 히끼씨는 “생활에 여러 가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시 의원은 좋은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지방자치를 모두 실감하고 있었다.
한국 언론의 관심이 뭔지 눈치를 챘는지 이들은 화제를 자연스럽게 재일동포의 참정권 문제로 옮겼다. 이마하시씨는 “아마 일본에서도 (한국의 외국인 참정권 부여) 보도가 나가겠죠”라고 확신을 구하자, 우께가와씨는 “아직 에 그런 뉴스는 없었어요. 어쨌든 한국이 (일본을) 앞서나가는 것 같아요. 재일동포들도 이제 일본 정부에 ‘우리한테 투표권을 안 주냐’라고 요구할 수 있겠죠”라고 말했다. 셋 다 재일동포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이들은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재일동포와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4월15일 서울 명동 한성화교소학교에서 5?1 지방선거 투표권을 부여받은 영주 외국인들이 설명회가 끝난 뒤 모의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아시아에서 외국인에게 선거권을 부여한 나라는 한국이 처음이라고 한다.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시민권이 없는 영주권자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는다. 영국과 독일은 유럽연합 시민인 경우 지방자치단체장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고, 특히 영국은 영연방 시민이거나 아일랜드공화국의 시민들에게 의회의원 선거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까지 보장한다. 일본에서는 영주 외국인의 지방참정권 부여 법안이 국회에 상정됐으나 아직 처리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세 여성은 한국 땅에서 처음 행사하는 투표권을 꼭 행사하겠다고 말했다. 순간 머릿속에 2002년 지방선거의 투표율(48%)이 떠올랐다. 외국인들에겐 어렵게 얻은 선거권이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에겐 귀찮은 권리다.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