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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나는 찍고 싶다”

           
 
 
“나는 찍고 싶다” 
 
 2002년 06월 12일 (수)  한겨레21  11 
 
 
2002년06월12일 제413호  
 

“나는 찍고 싶다”

재외국민·지문날인 반대자·장애인 등 지방선거에서 ‘선택의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
 월드컵 열기에 묻혀 사상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할 것으로 보이는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참여 홍보에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일부 후보들도 가세했다. 서울 성북구 제1선거구 김범석 서울시의원 후보(민주노동당)는 막바지 거리선전전에서 “투표참여∼ 짝짝짝∼짝짝”을 주요 구호로 외치기도 했다.

참정권 행사는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이다. 투표를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이다. 하지만 선거에 참여할 길이 막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 권리가 없으니 이들에겐 선택의 자유도 없다.

 

재외국민, 왜 방법이 없겠는가

 

김인종(46)씨. 재외국민. 두 아이를 둔 성실한 대한민국 가장. 98년 10월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국내 기업 주재원으로 근무. 군복무 마쳤고 ‘유리알 지갑’으로 불리는 주재원답게 근로소득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 꼬박꼬박 냄. 투표권? 없음.

조성도(18)씨. 선거연령 미달자. 성균관대 인문사회계열 1년. 징집 대상이며 결혼을 할 수 있고 성인영화도 볼 수 있고 법을 어겼을 때는 에누리 없이 처벌받는다. 신문 정치면도 꼬박꼬박 본다. 투표권? 없다. 2004년 총선까지 기다려야 한다.

 
사진/ 지문날인 거부로 주민등록증이 없는 윤현식씨. 선관위 유권해석에 따라 사진 붙인 주민등록등본을 떼러 동사무소를 찾았으나 거절당했다. (박승화 기자)


윤현식(33)씨. 지문날인 반대자. 건국대 법대 대학원 재학 중. 뜻한 바 있어 지문날인을 거부해 주민등록증이 없다. 학생증을 빼고는 여권이나 운전면허증 등 대체 신분증이 없다. 투표권? 선관위는 있다고 하고 행자부는 없다고 한다.


 

서승연(35)씨. 지체1급 장애인. 아이 둘 둔 주부. 87년 대선을 시작으로 단 한번도 투표에 불참한 적 없음. 그러나 2000년 4·13 총선 때 복지관 2층에 마련된 투표소에 못 올라가고 선관위 직원에게 모욕당한 뒤 투표 포기했음.

윤형미(25·가명)씨. 판매·유통 노동자.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아침 10시부터 밤 9시까지 발이 퉁퉁 붓도록 서서 근무함. 투표권? 있음. 하지만 2000년 총선에 참여하지 못했고, 6·13 지방선거도 결근이나 지각을 하지 않는 한 참여가 어렵다

다섯 사람 모두 정도와 조건의 차이는 있지만 참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재외국민과 만 20살 미만인 사람들은 ‘법적으로’ 선거권조차 없다. 지문날인 반대자와 부재자 신고기간 이후에 구금된 미결수들은 ‘행정 절차상’ 선거에 참여하기 어렵다. 장애인은 선거권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투표소 접근이 쉽지 않고 후보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어렵다. 임시·일용직 노동자 역시 선거권은 있지만 무용지물이다. 하루 일 빼먹고 투표했다가는 일당은 물론 일자리도 잃게 된다.

 
사진/ 만 18살인 대학 1년생 조성도씨. 선거연령을 낮추자는 인터넷 캠페인을 준비 중이다. (박승화 기자)


법적인 한계로, 행정 절차상의 이유로,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투표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선거의 아웃사이더들은 이렇듯 각계각층에 다양하다. 줄곧 선거에서 소외돼 오던 이들이 양대 선거를 앞두고 자구책 마련에 나서 눈길을 끈다. 가장 먼저 움직인 이들은 재외국민들.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해외 거주자들은 선관위 통계에 따르면 270만명, 외국 국적을 취득한 해외동포까지 합하면 570만명이 넘는다. 프랑스 동포신문 <오니바> 편집장 김제완씨는 한겨레네트워크(www.hankyore.net)를 결성해 재외국민 참정권 회복을 위한 서명운동에 들어갔고, 한나라당 이부영 의원과 민주당 정범구 의원은 선거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오는 대선까지 이들의 참정권이 회복될지는 미지수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30개국 중 재외국민의 선거권을 보장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단기 체류자의 경우에도 ‘비행기 타고 와서 선거하지 않는 한’ 방법이 없다. 중국에 살고 있는 김인종씨는 “정부는 절차상의 어려움을 내세우는데, 한국 조간신문이 당일 오후면 베이징에 도착하고, 전 세계가 네트워킹으로 연결되는 인터넷 시대에 왜 방법이 없겠는가”라며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본다”고 말했다.


선거 연령 문제는 지난 총선 때도 논란이 일었으나 한나라당, 자민련의 반대로 법 개정이 무산됐다. 몇 차례 헌법소원을 내기도 한 만 20살 미만자들은 6월13일을 전후로 사회당, 문화개혁을위한시민연대 등과 손잡고 거리 캠페인을 계획 중이다. 조성도씨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어린 것들이 뭘 알아’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성인의 의무는 감수하면서 주권행사는 못하는 상황이다”라며 “선거도 한번 못해보고 군대에 가는 억울한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청소년 웹연대 위드(www.mywith.net)에서 팽도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는 조씨는 대선까지 인터넷 모의투표를 벌일 계획을 갖고 있다.

군대는 가도 투표는 못한다

 
사진/ 지난 4·13총선 때 2층 기표소로 올라가지 못해 투표를 포기해야 했던 서승연씨. 최근 선관위를 상대로 한 참정권 박탈 위자료 청구소송에서 승소했다. (이정용 기자)


외국민 참정권이나 선거연령 문제는 법 개정 작업과 맞물려야 한다. 그러나 법이 라 행정적인 문제로 참정권 행사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있다. 6월7일 오전 서울 광진구 화양동사무소. 주민등록증이 없는 윤현식씨는 선관위 유권해석에 따라 신분 확인용으로 사진 붙인 주민등록등본을 떼러 동사무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결국 행자부 지침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지문날인 거부자들은 전국적으로 2천명이 넘는다. 이들 가운데 대체 신분증이 없는 이들은 투표소에 들어가도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길이 없다. 지문날인 반대연대(www.finger.or.kr)는 6월10일부터 13일까지를 사진 붙인 주민등록등본 떼기 집중 행동 기간으로 잡고 있다. 지문날인 거부자들과 함께 ‘행정상’ 투표권 행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들은 부재자 신고기간 뒤에 구금된 미결수들이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인권운동사랑방은 이들의 투표참여 실태와 불이익 여부 등을 조사할 예정이다.

 

법적으로, 행정적으로 선거권을 갖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투표참여가 어려운 장애인들은 선거에서 줄곧 소외됐다. 경기도 광주시에 사는 서승연씨는 2000년 4·13 총선 때 황당한 일을 겪었다. 투표소에 가보니 기표소는 2층이었다. 선관위 직원들에게 안내를 요청하자 “힘들면 다음번에 선거하라”는 모욕적인 말이 돌아왔다. 장애인 투표 편의시설 설치는 의무사항이다. 그러나 선관위가 이를 이행하지 않아 수많은 장애인들이 선거불참으로 내몰린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서씨는 2000년 총선 직후 광주시 선관위원장을 상대로 위자료청구소송을 내, 5월30일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위자료는 50만원으로 판결이 났지만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뜻깊은 성과였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www.cowalk.or.kr)는 “2002 지방선거 장애우가 바꾼다!”는 기치 아래 장애우 유권자단을 모집하고 있다. 장애우 유권자단은 후보들의 장애인 정책을 검증하고 연설 내용을 모니터하는 한편, 투표소 접근권과 정보 접근권을 침해당한 사례를 신고·접수받을 예정이다.

‘증거’ 없애려고 출근도장도 안 찍는다?

중앙선관위는 6월7일 100대 기업에 협조 공문을 보내 선거법과 근로기준법상 ‘투표권 행사를 위해 필요한 시간을 보장하고 이를 휴무 또는 휴업으로 보지 않는다’는 규정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러나 지방선거날은 임시휴일이 아니다. 노조가 있는 사업장에서조차 정상 출근을 해야 하고, 상당수 사업장은 선거 당일에 조근·야근·특근까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민주노동당(www.kdlp.org)이 운영하는 투표방해 신고센터에는 각 사업장 노동자들의 하소연이 올라왔다. 서울 구로동의 한 유아복 생산업체는 출근도장을 안 찍어 선관위에 신고할 ‘증거’를 없애면서까지 투표권 행사를 침해한다는 사례 고발도 있었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윤형미씨는 “지난 대선·총선 때 너무 피곤해 선거를 못하고 출근했다”며 “선거참여가 저조한 데는 유권자의 책임도 있지만 노동자들의 투표권 행사를 방해한 고용주들과, 이들을 강력히 처벌하지 않은 정부의 책임도 크다”고 강조했다.

선거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정치적으로 발휘할 소중한 공간이다. 양대 선거를 치르는 올해, 투표를 안 하는 사람이 많다는 걱정만 할 게 아니라 투표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에 대한 사회 전체의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참정권 침해를 견디다 못한 이들은 6월11일 ‘2002 양대선거 참정권 보장을 위한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오는 대선까지 공동행동에 나설 계획이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