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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동포신문 오니바 13년 기록(1)

프랑스동포신문 오니바 13년 기록(1) 
 

 2011년 11월 27일 (일)  김제완  
 
 

다음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준비하는 유럽 한인사중에 유럽동포언론 편에 들어갈 예정인 글입니다. 

<오니바 소개글>

오니바(oniva)는 함께 가자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합성어이다. 혼자 하는 일은 잘 하지만 함께 하는 일에 서툴렀던 재불한인들을 보면서 지은 이름이다. 한국에서 출판사에서 일을 하다가 늦은 나이에 유학 와서 동포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신문 발행이라고 여겼다. 당시 박사준비과정에서 사회운동을 전공하고 있었던 점도 영향을 끼쳤다. 93년12월 창간한 뒤 2006년까지 13년간 발행했다.

오니바의 독자인 1만5천명 재불동포 유학생들과 기쁨과 슬픔 고난을 함께 했다. 큰 힘을 주었던 사람들도 잊을 수 없다. 창간호가 나온 직후에 훗날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로 유명해진 이재웅씨가 친구와 함께 찾아왔다. 유학생이었던 그는 창간사를 읽고 마음이 움직였다면서 당시 외국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천리안 하이텔을 파리 사무실의 컴퓨터에 연결해주었다. 그가 94년 12월에 기고한 글 “꿈의 통신망 인터넷의 세계”는 정보통신 혁명이 펼쳐나갈 새로운 세상을 그리고 있다.

오니바의 대표적인 기사는 2000년 2월 프랑스 정치망명객 이유진선생 인터뷰 보도였다. 김대중대통령 방불 한달 앞두고 나온 기사 “자유인 이유진씨의 신념과 분노”는 큰 반향을 일으켜 국내매체의 후속보도가 잇달았다. 문화방송 MBC스페셜과 한겨레신문 동아일보 경향신문등에서 보도해 한국사회의 주요 이슈로 대두됐다. 국내 입국하려면 소명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한국정부의 요구와 이선생의 완강한 거부입장이 맞서 일년여동안 많은 곡절을 거쳤다. 결국 2001년 7월 소명없는 입국이 가능해졌다. 그 과정에서 이유진선생귀국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오니바는 전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도했다.

오니바의 비판기사로 한국정부와 불편한 관계가 이어졌다. 2000년 12월호에는 72년 4월 이수영 주불 한국대사 자살사건과 관련된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사망 당시 르몽드지가 보도한 한국정보기관과의 갈등설이 근거였다. 오니바 발행인은 이 사건을 당시 발족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제소했다. 73건의 제소사건중에서 가족이 아닌 제3자가 의뢰한 유일한 사건이었다. 위원회는 두차례에 걸쳐 조사했으나 기각해 사실상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

오니바가 널리 알려진 것은 97년 5월호에 보도한 브리지트 바르도 사건이 계기가 됐다. 2002 한일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프랑스 여배우 바르도가 김영삼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한국 월드컵개최 반대운동을 펼쳤다. 개고기 식용이 이유였다. 이때 바르도재단의 홈페이지에는 끔찍한 사진이 몇장 올라있었다. 그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시장에서 개를 몽둥이로 패는 장면이 있었다. 개가 고통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뛰어오르고 있는 비참한 장면이다. 이때 오니바 사무실로 파리4대학 유학생의 제보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이 사진의 배경이 한국이 아니라며 군중속에서 인민모를 쓰고 있는 사람을 지적했다. 기사가 나가자 파리의 한국언론 특파원들이 일제히 받아 적어서 조선일보등 일간지 네 곳에서 보도됐다. 그뒤 분노한 한국 네티즌의 공격으로 바르도재단 사이트는 다운되고 말았다.

97년 4월 동포언론중에 처음으로 5회에 걸쳐서 재외국민 참정권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한글로 된 자료가 없어서 주불 일본 대사관과 독일 대사관등에 전화해서 자료를 모아서 각국의 사례를 취재했다. 2000년 11월 한국에서 재외국민참정권회복을 위한 한겨레네트워크 준비위를 발족해 정지석변호사와 함께 공동간사로 활동했다. 이어서 2001년 2월 정범구의원과 함께 서울에서 공청회를 열어 해내외국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당시 발표한 “재외국민의 빼앗긴 한표”라는 발행인의 기사는 이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문건으로 평가받았다.

재외국민 참정권 되찾기 운동은 오니바의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기게 했다. 참정권은 재불동포들 자신의 문제임에도 관심이 적었다. 마치 벽에다 대고 소리치는 듯했다. 그래서 2002년 한국기자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이상기 한겨레 기자에게 제안해서 그해부터 재외동포기자대회를 열었다. 동포언론 기자들을 먼저 설득해서 홍보하려는 심산이었다. 이 대회 준비팀장으로 일하며 세계각국 동포기자들 50여명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 자리에서 재외동포언론인협의회 초대 대표간사로 선임됐다. 이 협의회 활동의 일환으로 재외동포신문을 2003년 4월 창간하고 초대 편집국장을 맡았다. 오니바의 “월드 에디션”이라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