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제완 보도기사

[한국] 빠리와 서울, 글자를 무기삼아 헤쳐온 20년

빠리와 서울, 글자를 무기삼아 헤쳐온 20년 
세계로 대표 김제완 라이프 스토리

2009년 03월 09일 (월)  세계로    

10년 넘은 해외생활끝에 서울에 돌아와 만난 사람들은 나를 여전히 80년대의 도서출판 오월 발행인으로 기억한다. 그중에는 프랑스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해외동포들중에는 내가 서울에서 어떤 일을 했었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같다. 그래서 빠리와 서울에서 오가며 지낸 라이프 스토리를 써보라는 ‘한국평화문학’ 에디터인 이승철선생의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 써놓고 보니 이력서라는 뼈대에 살을 붙인 것같은 글이 됐다. 이글은 평화문학 2009년호에 게재됐다.

<집행유예기간에 빠리로 떠나다> 

91년 7월 김포공항 출국심사장. 여권에 출국도장이 찍히기까지 불과 몇분동안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긴장감 때문에 손에서 땀이 났다. 국가보안법 집행유예기간 2년이 끝나지 않았지만 유학목적으로 빠리로 출국하는 길이었다. 당시 노태우정권은 시국사범에게 여권을 내주지 않아 사실상 출국금지 조치를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통제하지 못했다. 이런 허점을 이용해 김포공항을 빠져나갈수 있었다.

91년은 천안문 사건과 베를린 장벽 붕괴등으로 사회운동이 혼란에 처해있던 시기였다. 당시 사회운동의 향도역할을 했던 사회과학출판사들은 운동 전반의 위기와 함께 경영난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래서 운동권 일각에서 외국에 나가 공부를 해보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나도 운좋게 그 대열에 낄수 있었다. 

설흔 다섯의 나이에 떠난 유학생활은 고난과 행운이 엇갈렸다. 빠리에서 지금 세종연구소에 있는 정성장 박사를 만났는데 나를 자신의 빠리10대학 지도교수에게 이끌고 갔다. 그래서 북한 문제를 연구하기로 하고 입학허가를 받았다. 북한 책을 팔아 얻은 돈으로 유학나왔으니 북한을 연구하는 것이 도리에 맞을 것같았다. 그러나 개인적인 관심사가 따로 있었다. 결국 한국의 80년대 사회운동을 주제로 쓰기로 하고 빠리사회과학대학원(EHESS) 박사준비과정에 입학했다. 사회운동 연구의 석학인 알랭 뚜렌 교수의 마지막 제자로 들어가 한국유학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뚜렌교수의 제자중에는 천안문사건 주동자로 프랑스에 정치망명한 북경대 학생이 한명 있었다. 공산주의국가에서 자유주의 운동을 하다가 나온 그와 극우반공정권에서 북한서적을 펴내다가 온 내가 한 교실에 앉아 있었다. 둘다 조국정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만 같을 뿐 사상 행동의 궤적은 대척점에 있는 것 아닌가. 이에 대한 뚜렌교수의 입장은 무엇일까. 그의 이론에 따르면 사회운동은 권력에 대한 보완관계에서 자리매김된다. 우파 권력 치하에서는 좌파 사회운동이, 좌파 권력에는 우파 사회운동이 필요해진다. 나의 의문은 이렇게 해결됐다. 

내가 프랑스를 선택한 것은 이데올로기의 종주국에서 좌파와 우파 이념에 얽힌 여러 관계들을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80년대 한국사회를 거치면서 왜 이념의 차이가 절친한 친구들 조차도 멀어지게 하는가, 그 속성이 무엇인 걸까, 이런 것이 그 당시 나의 절실한 관심사였다.

동포신문을 발행하면서 그리고 공부하기에 늦은 나이 때문에 논문을 중도에 포기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인생의 소중한 기회를 놓친듯하다. 이념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한국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이미 박사학위논문으로 쓰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그래서 이 어렵고 골치아픈 문제를 아주 재미있는 책으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 최근 여러달동안 나는 이념 문제를 1천매의 원고로 쓰기 위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에디터출신 답게 <좌우간에>라고 제목도 미리 잡았다. 좌파와 우파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란 뜻이다.

<93년 프랑스동포신문 오니바 창간해>

유학생신분이었던 93년 12월 나는 빠리에서 동포신문 오니바 ONIVA를 창간했다. 그동안 왜 신문을 낼 생각을 하게 됐는가 질문을 많이 받았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운동을 공부로 하기보다 직접 실천해보자는 욕구가 컸다. 대외적으로는 배타적이면서 내부에서는 분열돼 있는 동포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내가 무언가 역할을 할수 있을 것같았다. 그래서 잉크밥먹고 살아온 터에 배운 도둑질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당시 창간호를 낸뒤 창간사를 보고 공감했다면서 이재웅씨가 친구와 함께 찾아왔다. 그의 덕분에 오니바의 컴퓨터는 첨단 시스템을 갖출수 있었다. 이씨는 그뒤 귀국해서 '다음커뮤니케이션'을 만들었다. 창간호 만드는 일을 같이 했던 사람과 결혼도 했으니 행운을 가져다 준 신문인 셈이다.

서울에 오면 ‘오니바’는 암호와 같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사람은 이 말을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불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프랑스어를 아는 사람은 “함께 가자”는 뜻을 가진 합성어임을 곧 알아채고 재미있어 한다.

오니바 발행인이자 기자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0년 2월부터 1년이상 프랑스의 정치망명객 이유진 선생의 소명절차 없는 무사귀국을 위해 한국정부와 치열하게 맞서싸운 일이다. 당시 한국언론에도 떠들썩하게 보도됐고 6.15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어 유리한 싸움이었다. 마침내 목적했던 대로 이선생은 다음해 7월 귀국해 정보기관의 조사를 받지 않고 서울에 한달정도 머물다가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보도했던 서울의 기자들이 모여서 이사모(이유진선생을 사랑하는 모임)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의 올곧은 인격에 감명을 받고, 모처럼 언론인으로서 보람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했던 기자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다. 신동아 정현상기자가 줄곧 총무를 맡고 있다. 

그리고 72년 4월 주불대사 이수영의 의문의 자살사건을 2000년 12월 보도했다. 정보기관과의 갈등설을 소개한 르몽드의 사건 당시 기사가 근거였다. 이어서 가족이 아닌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당시 발족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제소했다. 그러나 2차에 걸쳐 심사를 했지만 납득할수 없는 이유로 기각돼 앞으로의 과제로 남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한국의 개고기문화를 지적하면서 월드컵을 보이코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김영삼대통령에게 항의편지를 보내 한국사회에 파문이 일었었다. 당시 브리지트 바르도 재단의 인터넷사이트에는 재래시장 한복판에서 개를 잡는 사진들이 올라있었다.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를 몽둥이로 패서 죽이는 장면이었는데 개가 고통때문에 사람키보다 높이 뛰어오른 장면을 카메라로 잡았다. 개의 비참한 모습은 웃고 있는 군중들의 얼굴과 비교되어 동물애호가들에게 분노를 사고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 빠리 유학생중 한명이 오니바에 전화를 걸어왔다. 이 사진이 한국 것이 아닌 것같다고 했다. 군중사이에 인민모를 쓴 사람이 한명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중국인이고 무대도 중국인 것이 밝혀졌다. 이 사실을 기사화하자 빠리의 한국특파원들이 받아쓰고 한국에 전해지자 분노한 네티즌들이 브리지트 바르도 재단 사이트를 공격했다. 결국 그 사이트는 다운되고 말았다.

빠리에서 동포신문을 내는 동안, 서울에 돌아와서 ‘재외동포신문’을 내는 동안 세계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동포사회를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어떤 사람과 궁합이 맞는 도시가 있고 그렇지 않은 도시가 있다는 식견이 생겼다. 그래서 이따금 유학이나 이민을 가려는 사람에게 ‘컨설팅’을 해주곤 한다.  

그 비결은 사실 별 것 아니다. 사람들을 뉴욕형과 빠리형 두부류로 나눌수 있는데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며 욕심이 많은 사람은 뉴욕으로, 그 반대 유형의 사람은 빠리로 가는 것이 좋다. 이게 맞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종종 보아왔다. 프랑스 동포사회에서 흔히 듣는 말인데 “빠리에서는 욕심을 내면 불행해진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미국에는 “보이스 비 앰비셔스!”라는 말이 있다. 아주 긴 국경선으로 접해 있는 미국과 캐나다도 뉴욕과 빠리만큼이나 다른 사회라는 것을 이민 떠날 때 반드시 알아야 한다.

지난 2002년 친구인 한겨레 이상기기자가 한국기자협회 회장이 됐다. 그에게 해외에도 동포언론과 기자가 있으며 신문 숫자만도 450개가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기자협회가 나서서 이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자면서 그 방법으로 재외동포기자대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이회장도 적극 동의해서 2002년 10월 나는 이 대회 준비팀장으로 서울에 왔다. 그때 열린 제1회 재외동포기자대회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재외동포언론인협의회’가 구성됐고 첫해 일년동안 내가 대표간사를 맡았다.

나는 이 협의회 활동의 일환으로 2003년 4월 ‘재외동포신문’을 창간해 편집국장을 맡았다. 이때 ‘발로뛰는 영사상’ ‘재외동포기자상’ ‘올해의 인물상’등을 만들었다. 2006년 4월 예기치 않은 일로 갑자기 신문사를 그만두고 2007년 1월 인터넷동포신문 “세계로” www.toworld.kr를 창간했다. 2002년 10월부터 불과 수개월동안 대회, 단체, 신문사를 만들었다. 나에게는 격동의 시기이자 전환기였다. 이를 계기로 서울 떠난지 11년만에 돌아오게 됐다.

<재외국민 참정권 되찾기 운동에 집중해>

빠리와 서울에 걸쳐 재외동포 언론운동을 하면서 내가 가장 집중한 것은 재외국민 참정권 되찾기였다. 이 문제는 대통령선거가 있는 5년마다 이슈가 됐다. 선거가 있는 해마다 동포사회가 웅성거렸다. 왜 우리는 투표권이 없는가 라면서...

지난 97년 대선을 앞두고 오니바는 재외국민 참정권을 주제로 한 특집 기사를 다섯차례 냈다. 한국의 신문에는 이와 관련된 하나의 기사도 찾을수 없었던 때였다. 자료도 없어서 직접 빠리의 독일 일본 대사관에 전화를 해서 그들의 상황을 취재해 보도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둔 2001년 11월에는 “재외국민참정권 회복을 위한 한겨레네트워크 준비위원회”를 띄웠다. 정지석변호사와 내가 공동간사를 맡았다. 정변호사는 80년대 백두출판사를 운영했던 출판동지였다. 그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내는 대업을 이뤄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이해 4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재외국민참정권연대’를 출범시켰고 나는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때부터 법안이 통과된 올해 2월까지 여러 활동을 펼쳤다. 2007년 6월에는 재외동포들이 헌법기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그 준비작업을 담당했다. 재외동포기자들은 헌법재판소 정문에 모여 “재외국민 참정권 조속히 선고하라”고, 전세계 여러나라에서 온 한인회장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재외국민 참정권 돌려달라”고 외쳤다. “300만 재외국민 투표하고 싶다”는 샌드위치 간판을 목에 걸고 국회앞에서 1인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참정권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주요국면 마다 재외동포의 입장를 담은 성명서를 냈지만 받아주는 신문이 없었다. 그래서 일간지 오피니언난을 이용할 생각을 하게 됐고 지난 2년동안 열 번 넘게 칼럼을 기고했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 오히려 원고료를 받으면서 홍보활동을 해온 셈이다. 

종종 듣는 질문중에 하나는 어떤 계기로 참정권운동에 눈을 뜨게 됐는가 하는 것이다. 90년대 초 프랑스신문을 읽다가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빠리의 초등학교 운동장에 길게 줄을 선 알제리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대통령 선거에 투표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아무도 해외에서 투표를 할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당시에 그 사진 한 장이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후 90년대 중반 빠리 거주 일본인들이 뉴욕 LA등 주요도시의 일본인 동포들과 함께 네트워크를 만들어 참정권회복운동을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당시 오니바에서 그들 단체의 사무국장을 인터뷰해 소개하기도 했다. 이같은 경험들이 나에게 참정권운동에 나설 개인적 동기가 되어주었다. 일본은 99년 선거법을 개정했다.

재외국민 참정권은 목표이자 수단이다. 그것 자체가 국민의 기본권이어서 목표였지만 그것으로 다른 일을 이뤄낼수 있으므로 수단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정부의 잘못된 동포정책을 재외국민들의 한표가 개선해낼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정부의 재외동포정책이 얼마나 엉망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를 들어본다.

“우리나라 헌법 2조2항이 무언지 아십니까?” 몇해전 어느 의원이 국회에서 대정부질문을 하며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물었다. 장관이 우물쭈물 하자 그뒤에 앉아있던 간부들중에 누구라도 대답을 해보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헌법 2조2항은 “재외국민은 법으로 보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법이 없는 입법부작위상태, 일종의 위헌상태가 20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외교관과 재외공관의 첫번째 임무가 자국민 보호인 것을 감안하면 외교부 장관이나 간부들이 2조2항의 내용을 몰랐다는 것은 어이가 없다. 법에는 정부의 입장이 담긴 것이라면 우리 정부는 재외동포에 대한 입장이 없는 셈이다. 그래서 한국정부의 동포정책을 무관심 무대응 무정책등 3무정책이라고 불려왔다. 

최근에는 많은 변화가 있다고 해도 이같은 현실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7대국회에서 재외동포기본법 재외동포교육문화진흥법 사할린동포특별법등 10개 가까운 동포관련 법안이 상정됐지만 단 하나도 통과되지 못하고 국회종료와 함께 폐기되고 말았다.

마침내 지난 2월5일 국회에서 공직선거법 국민투표법 주민투표법등 재외국민 참정권 관련 법안들이 통과됐다. 지난 72년 10월유신 직후 빼앗겼던 재외국민 참정권을 37년만에 되찾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번에 통과된 법안에 아주 많은 제약을 두었다. 우편투표도 도입하지 않았고 공관에만 투표소를 두어 수백킬로 떨어진 투표소를 찾아가도록 했다. 그들에게는 사실상 투표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치 여우집에 초대받은 두루미에게 접시에 스프를 담아서 먹으라고 내준 격이다. 앞으로도 또다시 법개정운동에 나서야 할 것같다. 그리고 어렵게 얻은 투표권을 이용해서 올해 내에 재외동포위원회법을 통과시킬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80년대 서울에서 출판운동에 참여>

91년 7월 프랑스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나는 20대말부터 30대전반기까지 사회과학출판사에서 일했다. 그 과정에서 파란곡절이 많았지만 여기서는 내가 펴낸 책들 몇권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대학졸업후 첫번째 직장이었던 도서출판 한마당에서 나의 출판 데뷔작을 펴냈다. 독일의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이 책은 시인 김광규선생이 번역을 맡아주어 85년9월 세상에 나왔다.  

김선생은 베르톨트의 세계에는 증오는 있을 지언정 슬픔은 없다고 말했으나 80년 5월의 암울한 그림자가 짙게 남아 있던 당시 상황에서 이런 제목을 뽑았다. 시집 제목의 출처가 된 시의 제목은 ‘나, 살아남은...’이었다.

출판계 데뷔작이 시집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대학생 시기 몇해동안 ‘문청’시기를 보냈던 시인지망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마포에 있던 자유실천문인협회회 사무실에 들락거리는 것이 너무 신이 났다. 김정환 시인이 사무국장으로 있을때였다. 그러나 시인지망생 꼬리표를 끝내 떼지 못했고 문학은 젊은 날 한때의 추억으로 남게 됐다.

브레히트 시집을 발간하고 몇해뒤 어느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시집과 시인의 만남의 과정을 소재로 시를 쓴 것이었다. 그뒤 같은 제목의 소설도 나왔다. 브레히트 시집은 지금도 서점의 서가에 꽂혀있다. 내가 펴낸 책중에 유일하게 20년이상 살아있는 책이다. 기억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 책은 나의 20대 젊은 날들의 열정을 에너지로 해서 세상에 나왔다. 

그뒤 도서출판 오월의 발행인으로서 펴낸 대표적인 책은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낸 ‘조선통사’와 멕시코의 만화가 리우스가 그린 마르크스 모택동 레닌 체게바라 카스트로등 영웅전 만화였다. 조선통사는 88년 9월 올림픽기간중에 나왔다. 대공과 형사들이 모두 올림픽에 동원돼 있어 책을 무사히 배포할수 있었다.

책발간 직후 조선일보 김태익기자가 기자수첩에 이책을 소개했다. 학계의 검증없이 출판운동차원에서 북한원전을 펴낸 것은 모험주의라고 비판한 것이었지만 이 기사가 나오고나서 책이 한 트럭이나 팔려나갔다. 당시 신문사 문화면에 이 책이 뉴스메이커로 떠올랐었다. 조선통사는 북한이 우리 역사를 어떻게 기술했는가를 보여주는 책이어서 운동권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관심을 가졌다.

이 책은 당시 한국사회뿐 아니라 발행인인 나의 젊은 날의 생애도 요동치게 했다. 단지 이책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다섯명이나 잡혀갔으니 나의 구속은 당연한 일이었다, 89년 5월에 박종철 사건을 담당했던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체포됐다. 20일동안의 수사가 끝나고 기소돼 검사실에 들어서니 검사의 첫번째 질문이 이 책을 몇권이나 팔았냐는 것이었다. 1만여부 팔았다고 얼버무렸지만 사실은 상하권 모두해서 4만권이 넘었다.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었으니 일반서적으로는 근 10만부에 해당한다. 이 책은 88년 말경 교보문고 전체 베스트셀러 4위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일송정 출판사의 최민희씨는 평생 출판쟁이 해도 그만한 책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코너를 배경을 사진 한장 찍고 오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서울과 빠리에서 80년대와 90년대를 보냈지만 나는 늘 '김편집장' 또는 '편집국장'으로 불렸다. 단행본 출판사에서 동포언론사로 마당만 바뀌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글자를 무기 삼아 난마와 같은 시대를 헤쳐온 20여년이었다. 

김제완 (인터넷 동포신문 ‘세계로’ 대표)

'김제완 보도기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포언론 지원법 추진할 터 ”  (0) 2015.11.28